[들어왔어요]


헤어진 자리 그대로 핸드폰을 들고 서 있던 현욱은 민영의 메시지를 받고 함박 미소를 지었다. 현욱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향해 빠이빠이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시 현욱은 심각한 표정으로 길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전화를 해야 하나? 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사실 현욱은 고백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모두 적당히 거절했었다. 현욱이가 먼저 여자에게 마음이 움직인 것은 태어나서 지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보자마자 반해서 집까지 쫒아오다니. 현욱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본인이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이 좀 기가 막혔다.


앗!  이런저런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이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현욱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오타가 있는지 세 번은 읽어보고서야 전송을 클릭할 수 있었다.


[예쁜아, 잘 들어갔다니 다행이야^^. 내일 학교에서 보자.]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잠시 후, 숫자 1이 사라졌다. 민영이가 바로 메시지를 읽은 것이다. 그런데 답이 너무 빨리 왔다.


[싫어요.]


현욱은 숨을 들이쉬고 눈알을 한번 굴린 뒤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예쁜아, 그럼 내일 아침에 여기서 기다릴까?]


[아. 진짜. 스토커예요? 하지 마요.]


현욱은  바로바로 답이 오는 것이 좋은 징조임을 느꼈다. 현욱은 숨을 한번 들이쉬고 다다다다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싫다면 안 할게.


단지 난, 민영이 네가, 너무 예뻐서, 정말 예뻐서 꼭 만나고 싶어.

그리고 나 이런 적 처음이야. 연애도 한 번 해본 적 없고.

그런데 지금 나 너무 당연한 것처럼 너에게, 예쁜 너에게. 이렇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예쁜아. 난 지금 아르바이트도 빠지고, 너를 졸졸 따라왔어. 운명이라고 믿으면서,


예쁜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던 나는 평생 이 날을 운명의 시작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너에게도 운명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혹시 모르니까.

나랑 데이트 한 번 하자.


후회 안 할 거야]


길 한가운데서 메시지 전송을  클릭한 후, 현욱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메시지 앞의 1은 사라졌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현욱은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길 한 가운데 얼음이 되어 답을 기다렸다.


민영은 현욱의 메시지를 읽었다. 하지만 답문은 할 수가 없었다.

멘트가 너무 조선시대 같고, 오글거렸다.


문제는 예쁜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싫지 않았다. 또 요즘 애들이랑 다르게 이모티콘 하나 없이 정중하고 진심이 느껴지는 문자가 이상하게 좋아 보였다.


미친년 같았다.


민영이는 일단 답을 보류하고, 괜히 친구들 페이스북에 들어가며  딴짓을 했다.


그런데 또 톡이 왔다.


[예쁜아. 우리 내일 만나는 거지? ^^]


민영이는 입술을 다물고 고민을 좀 했다. 이런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두면 문자질로 더 귀찮게 할 것 같았다. 차라리 내일 얼굴을 보고 정중히 거절을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내일 1시 학교 앞, 스타벅스에서 만나요]



숫자 1일  사라지자마자 현욱에게서 활짝 웃는 캐릭터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민영은 답을 하지 않았다.


*****************************************************************************


엘리베이터 속 거울을 본 민영이는 흠칫 놀랐다. 머리에 헤어롤 하나가 대롱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떼서 가방에 넣었다. 민망함에 거울을 보고 씩 웃었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의 뿌리가 검게 변해있었다. 주말엔 미용실을 가야겠다. 그것 빼고는 마스카라도 안 번지고, 핑크색의 틴트도 자연스러웠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플랫슈즈를 신었다. 신경 안 쓴 듯 편한 복장이지만 사실 긴 다리를 잘 드러내기에 민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코디였다.

‘그래,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는 안 듣겠지.’

기분이 좋아진 민영이는 거울을 보고 예쁜  척하며 씽긋 웃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민영이는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얼굴을 바꾸며 앞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전철 문이 닫혔다. 유리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민영이는 얼굴을 안 보는  척하며 본인 얼굴을 다시 점검했다. 갑자기 햇살이 반짝반짝 들어와 눈이 부셨다. 전철이 한강 위에 진입한 것이다.  작년 한 해 동안 거의 보지 못했던 눈부심이었다. 한 해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던 보람이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이 되었고, 더 예뻐졌고, 거절할 것이지만, 남자한테 고백도 받은 지금 새내기 시작으로는 100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영이는 문득 자기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민영이는 입꼬리를 내리며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거절을 하러 가는 길인데,  이렇게 기분이 좋아도 될까? 싶었다. 물론 기분 좋다고 고백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같은 학교도 싫고, 클럽 같은데도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키는 크지만, 좀 촌스러운 것도 맘에 안 들었다.


현욱은 스타벅스 앞에 있었다. 현욱은 핸드폰을 거울삼아 얼굴을 보고 있었다. 민영이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현욱이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현욱이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이면서 동시에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숙일지, 손을 흔들지 결정하지 못한 모습에 민영이는 큭! 하고 웃었다. 민영이는 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일 때 현욱의 컨버스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빨았는지 운동화 고무창이 하얗게 빛났다.

“안녕하세요. 왜 밖에 있어요?”

“응, 들어가기 싫어서. 날씨가 좋잖아. 게다가 들어가서 같이 있으면 지나가는 동기들이 볼 수 있으니까, 민영이 네가 더  불편할 것 같아서. 우리 여기 말고 사람들이 안 보는 데로 가자.”


차분하게 말하는 현욱의 목소리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둘은 캔 커피를 들고 학교 구석의 벤치에 나란히 그러나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민영이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뜸 ‘연락하지 마세요.’ 이래야 하는지. 아님 예의상 호구조사라도 하고, 맘에 안 든다고 핑계를 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썸 타는 남자 사람은 처음이라 똥이 마려운 듯 영 불편했다.


“있지.”

민영이가  불편해하고 있을 때, 현욱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민영이는 깜짝 놀라 방귀를 뀔 뻔했다.


“나는 경제학과 1학년이고, 삼수했어. 공부 못해서 삼수한 건 아니야. 진짜야. 고등학교 성적표도 보여 줄 수 있어. 삼수한 이유는 집안 사정이 있어서 대학 진학을 안 하려고 했었거든. 그러다 생각 바꿔서  입학한 거고. 장학금도 받고 있어. 난 사진이나 동아리 같은 거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짜 관심 없어. 어제는 고등학교 동창인 창수가 한 번만 나와달라고, 머릿수 채워달라고 해서 간 거야.

동아리 방에 가자마자 네가 보였어. 예쁘더라. 정말 진짜 너무 예뻐서 널 잡아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 그래서 기회만 계속 엿보고 있었어. 이름은 뭘까. 어떻게 말을 걸까.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낼까..... 그래서 내가 어제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나 너한테 반했어. 순식간이라고 가벼운 마음은 아닌 것 같아. 우리 정식으로 사귀자. 나 너 정말 좋아해.”


밤새 몇 번이고 외우고 연습했는지, 현욱은 줄줄줄 말을 했다. 말을 다 마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돌려 민영이를 보았다.

민영이는 현욱이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앞을 보며 입을 꼭 다물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오늘 볼터치는 잘 됐었나? 현욱 오빠가 보고 있는 왼쪽 빰에 점이 머리카락에 잘 가려져있겠지?’


민영이는 살짝 눈을 아래로 내리며 현욱이가 두 무릎을 꼭 붙인 채, 캔 커피를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현욱이가 다시 말했다.

“굳이 썸 타고 그러지 말자. 일단 사귀고. 그러다가 좋으면 계속 가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면 되잖아. 안 그래? 후회 안 할 거야. 나 내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까. 특히 너처럼 예쁜 여자 친구라면 더욱.”

“... 근데요...  그쪽은 아직 날 모르잖아요... 나도 그쪽이 어떤 사람인 지도 모르고.... 사귀는 건 좀......”

“얼굴 알면 됐지. 연애할 때 뭘 알아야 하는데? 난 아무것도 궁금한 거 없어. 넌 궁금한 거 있어? 다 대답해줄게. 물어봐.”


그때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민영이가 순간 흠칫 놀랐다. 현이도 민영이를 따라 고개를 돌려 고양이를 보았다. 현욱은 가방에서 천하장사 소세지를 꺼내 껍질을 깠다. 그리고는 고양이에게 다가가 소세지를 놓아주었다. 고양이는 소세지를 낚아채고는 후다닥 도망갔다.

현욱이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가끔 여기서 만나는 고양이야. 이 자리 은근 명당인 게 아주 구석진 곳도 아니면서 사람들 눈에 안 띄고 조용해서 내가 좋아하거든. 그런데 내가 올 때마다 벤치 아래에 앉아 있다가 도망가면서, 자기 자리 뺏기는  것처럼 꼭  한번씩 울고 가더라구. 그러다 요새 몇 번 소세지 줬더니 이젠 울지는 않더라고.”

오빠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물어보았다.

“자. 그럼 나에 대해 뭘 알고 싶어? 뭘 알면 나랑 사귈 거야?”

나는 현욱 오빠를 쳐다보았다. 왁스도 안 바르고, 염색도 하지 않은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남자치고 하얀 피부가 깨끗해 보였다.  긴장했는지 어금니 쪽의 볼이 움찍 거렸고, 목선에 핏줄이 하나 튀어나와있었다.


민영이는 생각했다.

잘 생겼다. 목소리도 좋다. 내가 예쁘단다. 날 보며 웃고, 긴장하고, 내 말이면 무엇이든 다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물에게도 잘하는 사람인데 이상한 사이코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제 대학생인데 금방 헤어지더라도 애인 한 번 만들 때도 됐지 싶었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생각날 때마다 천천히 물어볼게요.”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끝이 없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