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띠띠.


현욱의 집 현관문이 열리고, 민영이가 들어왔다. 현욱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 아침 9시였다. 민영이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민영이는 현관에 서서 집을 둘러보았다. 좁은 원룸은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깨끗했지만, 그래도 민영이 눈에는 대충 쌓아놓은 책이며, 옷가지들이 눈에 거슬렸다. 민영이는 신발을 벗자마자 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일단 책 가지들이며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충 정리가 된 다음에야 민영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가져온 앞치마를 꺼내 입었다.


핸드폰을 켜서 미리 저장해둔 레시피를 화면에 띄워 싱크대 위에 놓았다. 민영이는 조용히 손을 씻었다.


혹여 피곤한 현욱 오빠가 깰까 봐, 조용히 조심하며 음식을 만들고, 뒷정리까지 하고 나니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민영이는 요리하다 나온 그릇들까지 설거지를 했다. 깨끗한 부엌을 보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현욱은 아직도 코를 골고 있었다.


민영이는 조용히 현욱이가 더 잘 수 있도록 기다리기로 했다. 민영이는 음식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놀았다. 그러나 금세 사진 놀이도 싫증이 났고, 무엇보다 음식이 식고 있었다. 민영이는 계속 망설였지만, 결국 현욱이가 자는 2층 다락으로 올라갔다.


민영이가 현욱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어!”


현욱이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머, 놀랐어? 미안해.”


민영이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뭐야? 언제 왔어?”


현욱이가 놀라서 소리쳤다.


“아까왔어. 벌써 밥상까지 차렸고, 정말 나 온지도 몰랐어? 내가 덜커덕 거릴 때마다 오빠가 뒤척거려서 난 오빠가 잠깐씩 깼다 다시 자는 줄 알았어.”


“어휴... 깜짝이야. 정말 놀랐잖아. 전혀 몰랐어 니가 온 지.”


현욱이가 이불을 똘똘 싸매며 말했다.


“꿈인 줄 알았어. 정말 깜짝 놀랐네... 왔으면 조용히 깨우지. 이렇게 깜짝 놀래키면 어떡해.”


“미안, 근데 벌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어. 밥도 식어가고, 벌써 11시 30분이야. 이제 일어나자. 나 심심해. 같

이 밥도 먹자. 응?”


민영이가 이불을 들추며 말했다.


“잠깐만 두근거리는 심장 좀 차분히 만들고. 자기가 나 좀 진정시켜줘.”


현욱이가 이불속에서 침대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에이 나 그런 거 잘 못해. 심박수를 늘리는 건 해도.”


민영이가 씩 웃으며 이불속으로 들어가 현욱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현욱이가 민영이를 꼭 안아주며 입을 맞췄다. 그리고 민영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얼마 뒤, 현욱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민영이도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은 매우 좁았다. 두 팔을 양쪽으로 다 뻗지도 못할 만큼 좁았다. 작은 변기, 세면대와 샤워기가 한 세트로 되어 있는 수전, 그리고 수건이 5개밖에 안 들어가는 작은 수납장이 있었다. 구석에 작은 샴푸와 비누, 면도기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화장실 신발부터 변기까지 온통 물 천지였다. 키가 크고, 몸이 좋은 현욱이가 씻으려면 어쩔 수 없이 물이 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영이는 일단 최대한 벽에 붙었다. 조심조심 세수를 하고 몸에 비누칠을 했다. 몸에 물을 뿌릴 때는 샤워기가 벽을 향하도록 신경 쓰며 닦았다. 마지막으로 화장실 바닥에 물을 뿌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변기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았다.


다 닦은 후, 수건을 원피스처럼 몸에 두르고 화장실을 보았다. 현욱이 씻고 나왔을 때처럼 화장실은 온통 물 천지였다. 노력했지만, 정말 작은 화장실이라 어쩔 수 없구나 싶어 좀 맥이 빠졌다.


민영이는 화장실 습기를 빠지게 문을 살짝 열어놓고 밖으로 나갔다. 현욱이는 팬티만 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민영이는 주섬주섬 속옷과 옷을 입었다.


“오빠 밥 차릴 테니까 먹어요.”


“응, 완전 고마워.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 됐다. 뭐 도와줄 거 없어?”


“없어. 내가 다 했어. 헤헤 맛있게 먹어줘용.”


민영이는 거실의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다 차렸어. 와서 먹어요.”


현욱이가 팬티바람으로 내려왔다.


“에이 오빠 뭐라도 입고 먹어야지.”


“왜? 빤스는 입었잖아.”


“에이 그래도......”


“알았어용. 입으라면 입겠습니당.”


현욱이는 얼른 뛰어가서 잠옷을 입고 내려왔다. 민영이는 대낮에 잠옷을 입고 있는 게 맘에 안 들었지만 잔소리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모처럼 주말의 느긋한 하루였다. 맛있게 먹고 여유롭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현욱이는 민영이가 해준 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연신 맛있다고 해주는 현욱을 보며 민영이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밥을 다 먹고, 현욱이가 설거지를 하고 민영이는 누워서 텔레비전을 봤다.


민영이는 낮잠을 자고 현욱이는 그 옆에서 책을 읽었다.


민영이가 잠에서 깨고 둘은 다시 한 번 섹스를 하고, 손잡고 나가 점심 겸 저녁을 사 먹었다. 동화 같은 하루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웃으며 둘이 손잡고 집에 오는데 경비 아저씨가 현욱이를 불렀다.


“501호지요? 여기에 사인 좀 해주세요. 건물에 보수공사 찬성한다는 표시하는 거예요.”


현욱이 사인을 했다. 경비 아저씨가 민영이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색시인가? 새댁이 참 예쁘네.”


경비 아저씨의 말에 민영이가 괜히 고개를 숙이며 현욱의 뒤로 숨었다.


“네. 곧 결혼할 사람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현욱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민영이의 볼이 발개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민영이가 현욱이 품에 안기며 말했다.


“우리 결혼해?”


“그럼 해야지. 내가 반지는 괜히 준 줄 알아?”


현욱이가 웃으며 말했다.


“이히히히히. 좋아서, 여봉봉.”


민영이가 장난스레 말하자 현욱이도 민영이 정수리에 뽀뽀하며 말했다.


“정수리도 예쁜 우리 여보. 나도 좋아용. 빨리 돈 모아서 결혼합시다.”


둘은 와인을 한잔 따랐다.


“오빠. 집에 가기 싫다.”


“그래도 오늘은 가야지. 여행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됐어. 자꾸 외박하면 부모님이 속상해하실 거 아냐. 나중에 아시면 나 미워하실지도 모르고.”


“알았쪄요. 나 예쁘게 말 잘 들을게용. 호호 근데 우리 그럼 봄에 결혼할까?”


“봄? 내년 봄?...... 아직 시기는 생각 안 했는데. 나 요즘 입시 때문에 엄청 바쁜 거 알잖아. 일단 올해 수능 끝내고 천천히 생각하자. 급할 거 없는데 뭐.”


민영이는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남자의 일을 방해하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민영이는 이상한 기분을 서둘러 털어냈다.


“알았어요. 그럼 수능 끝나고 양가에 인사드리고 그때부터 준비해요.”


“그래. 고마워.”


현욱이 웃으며 민영이 손에 낀 반지에 입을 맞췄다.


“오빠, 오빠 집에 블라인드 달면 예쁠 거 같은데. 내가 선물해도 돼요? 또 소파도 우리 둘이 누울 수 있게 바꾸고 싶어.”


거실 바닥에 누워, 창밖을 보며 민영이가 말했다.


“그래 맘대로 해. 니 집인데 뭐.”


현욱이가 별생각 없이 말했다.


“헤헤헤. 집 꾸미기 해보고 싶었는데. 좋다.”


민영이가 꿈에 부풀어 현욱의 품에 더 꼭 안겼다.






“데이트 가는 거야?”


“아니야.”


민영이가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현욱이가 선물한 반지를 낀 이후부터 주말에 화장만 하면, 엄마는 계속 데이트하냐고, 그놈 만나러 가냐고 묻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솔직하게 데이트라고 말했지만, 그런 날이면 8시부터 전화를 하면서 빨리 오라는 둥, 술 먹지 말라는 둥, 잔소리와 감시가 너무 심해져서 그냥 데이트 아니라고 핑계를 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사실 더 속상한 것은 수능과 입시가 가까워 오면서 현욱 오빠랑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도 일요일이고, 현욱 오빠를 본 지 2주일이 지났지만 만나지 못하고 지은이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자꾸 현욱 오빠 만나러 가냐고 취조를 하니 짜증이 확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디 가는데?”


“어휴, 엄마, 오늘 애 낳기 전에 얼굴 보려고 지은이네 간다구요.”


“그래? 진짜야? 알았어. 지은이는 벌써 애기도 낳고 좋겠네. 약사니까 준비도 똑 부러지게 잘 할 거고.”


“그치.”


“시댁도 부자라면서 좋겠네.”


“그런가 봐.”


민영이는 화장을 고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넌 그래서 언제까지 그놈 만날 건데. 그리고 만나려면 정식으로 인사를 하던지. 난 돈 없고 직업 별로인 것도 맘에 안 들지만 남자가 말이야 나이 들어 만나면서 허락도 안 받는 게 더 용납이 안돼.”


“말했잖아요. 지금 입시철이라 바쁘다구요. 대치동 분위기 엄마도 알면서 왜 그래요. 그리고 일단 내가 아직 마음을 확실하게 잡은 것도 아니에요. 아직 그런 사이 아니라구요.”


“흥!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여자 잡으려고 마음먹었으면 일단 도장부터 찍고, 잡고 보는 법이야. 니 말대로 그놈이 널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가 보다.”


“엄마!”


민영이가 꽥 소리를 지르자 엄마는 입을 다물고 민영이를 흘겨봤다. 민영이는 가방에 바르던 립스틱을 집어넣고 벌떡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지은이랑 오랜만에 수다 떨고 올 거라 늦을 거예요.”


엄마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대를 잡았다. 손가락에 반지가 반짝였다. 민영이는 한숨을 살짝 뱉었다.


현욱 오빠는 여전히 자상했고, 여러 가지로 열심히 살았다. 성실하고 착한 그리고 날 사랑하는 사람이다. 단지 수능 때문에, 일 때문에 몇 달의 시간을 필요로 할 뿐이다. 기댈 부모조차 없는 오빠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했고, 또 그런 점 때문에 현욱 오빠를 사랑하는 것이었기에, 지금 내 상황을 말하면서 일단 인사부터 오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학생까지 하늘나라로 보내면서까지 일하는 상황인데 스트레스를 주기 싫었다.


하지만 성급한 엄마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입을 다물고 무시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빠였다. 아침마다 또 회사에서 아빠를 볼 때마다 민영이는 오히려 더 빨리 자랑스러운 현욱이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었다. 그리고 또 본인에게 짜증이 나는 것이다.


에휴... 민영이는 한 숨을 크게 뱉어 버리고, 액셀을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


지은이네 집은 꽤 넓었다.


“우와, 몇 평이야? 엄청 넓다.”


“평수로는 얼마 안돼. 40평 대야. 난 잘 모르겠는데 구조가 잘 빠져서 넓어 보이는 거라고 하더라.”


“그러게, 60평대 인 줄 알았거든. 어머 이 가구 엄청 멋지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꾸몄어? 어! 나 이거 봤어.”


민영이가 거실 구석에 놓인 사이드 테이블을 보고 말했다.


“네이버 카페에 레몬 테라스라는 카페가 있거든. 거기서 봤는데. 예뻐서 기억해두고 있었거든. 나도 이거 현욱 오빠네 두고 싶다 생각했는데, 이야 여기서 보네. 잘 어울린다.”


“그래? 너도 레테 해?”


“호호. 요즘 오빠네 집 꾸미는데 꽂혀가지고 인테리어 카페 들락날락 거리거든.”


“나도 결혼 준비하면서 맨날 들어갔었는데. 호호 다 똑같구나. 니 말대로 거기서 본 거 맞아. 거실에 애기 기저귀 둘 데가 필요했거든. 일반 국민 기저귀함은 플라스틱이고 해서 뭐 둘까 고민하다가 여기 자잘한 서랍이 맘에 들어서 어제 들여왔어. 시어머니는 싸구려 샀다고 뭐라고 해서 맘이 안 좋았는데. 니가 예쁘다고 해주니까 안심이야 하하하.”


“이야. 역시 돈이 많으니까. 마음에 들면 척척 사는구나. 집 잘 꾸몄다. 참 예뻐.”


민영이가 소파에 앉아 집을 다시 한 번 쭉 둘러보며 말했다.


지은이는 학창 시절의 민영이가 생각났다. 민영이는 욕심이 없기에 질투를 하지 않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키가 크고, 몸매도 좋고, 공부도 잘한다며 시기할 때 민영이는 그런 적 없이 순수하게 응원해주고, 부러워해주었다. 지금도 한 올의 질투도 없이 순수하게 칭찬해주는 민영이었다. 어쩌면 민영이가 이미 가진 것이 많기에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고, 그런 민영이를 지은이가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은이는 자격지심도 있고, 남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싶어 하는 자신과는 다른 민영이가 항상 좋았다.


“고마워. 시댁에서 흠잡을까 봐 얼마나 신경 써서 꾸몄는지 몰라. 돈도 시댁에서 다 대준 거라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 그래서 사실 가구 하나 내 맘대로 한 거 없어. 시어머니가 거의 다 결정했지. 니가 칭찬해준 저 테이블 저것만 내 맘대로 한 건데 바로 지적받고 말이야.”


“시어머니 안목이 좋으시네. 잔소리만 하는 거 아니고, 돈 주신다면서 그럼 쫌 참을 만 하지 머. 게다가 솔직히 어머님 안목 좋긴 좋잖아. 배우면서 천천히 니 스타일대로 바꾸면 돼지. 울 언니 보니까 주는 것도 없이 바라면서 잔소리하는 시어머니도 있더라.”


“그건 그래. 일단 집만 봐도 내가 투덜대면 안 되겠지...... 참, 커피 마실래?”


둘은 넓은 식탁에 앉았다. 벽에는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제 금방 애기도 나오고 어른 됐네 이지은. 난 아직도 철없는 애 같은데.”


“그러게 내가 엄마가 되다니.. 믿기지 않아. 우리 딸 잘 기를 수 있을까?”


“뭐가 걱정이야. 창수 오빠는 너만 바라보는 사람이고, 너 똑똑하고, 부자인 시댁에, 친정에서 애기도 봐주신다면서, 솔직히 고민할 거 없어 보이는 걸.”


“휴~ 그럴까?”


“왜 무슨 걱정 있어?”


“걱정이야 많지. 일단 친정이...... 휴...... 얼마 전에 친정 아빠가 또 사고 쳤어. 내가 급한 대로 마이너스 통장 만들어서 몇 천 해드렸어. 그래서 애 낳고 바로 일 하려는 거야.”


“뭐?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솔직히 돈 문제가 아니면 내가 뭐가 급해서 애 낳고 바로 일하러 나가겠냐. 당장 친정에서 생활비도 없다고 하고, 마이너스 통장도 갚으려면 나가야지. 게다가 그냥 드리면 오빠랑 시댁 눈치 보이니까 애라도 맡겨야 육아비 핑계로 몇 백씩 드려도 쫌 떳떳할 거고......”


“어휴...... 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애를 봐야 한다던데......”


“그러게. 게다가 오빠도 속을 모르니까. 일하지 말라고 성화고. 시댁은 더더구나 반대하지. 게다가 친정 부모

님이 애 봐준다는 핑계로 아예 여기서 같이 살자고 하시는 거야. 시댁에서 해준 집인데...... 신랑이랑 시부모님 눈치 보여서 미치겠어.

어제는 시어머니가 날 부르더니 애 낳으면 매달 100만 원씩 용돈 줄 테니까 편하게 쓰고 일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 친정에 그냥 주라는 뜻이겠지......

참 감사한데 친정에 100만 원은 부족해. 200만 원은 드려야 생활하실 거야. 게다가 나 마이너스 통장도 갚아야 하니까. 그래서 죄송하다고 나가서 일하겠다고 말했는데 시어머니가 엄청 기분 나빠하면서 나보고 못된 고집쟁이라고 하는데...... 할 말도 없고 미치겠더라.

나도 애만 보고 싶은데, 방법은 없고, 친정이 이렇게 발목을 잡으니까 너무 속상해.”


민영이는 지은이의 말을 들으며 순간 ‘현욱 오빠 부모님은 가난하지만, 돈 달라고는 안 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비교하는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지은이의 긴 독백이 비로소 끝났을 때, 민영이는 위로를 해야 할지, 날카로운 충고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괜히 딴 소리를 했다.


“이 커피잔 이거 무슨 브랜드야? 예쁘다.”


“몰라. 시어머니 친구가 선물 줬는데 어디 건지는 모르겠어. 참. 근데 넌 정말 결혼할 거야?”


“해야지. 수능 끝나면, 집에 인사 오기로 했어.”


지은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민영이를 바라봤다.


“왜? 왜 내가 현욱 오빠랑 결혼한다고 말하면 다들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왜 그래?”


“너가 안됐어서. 너처럼 똑똑하고 예쁘고 당당한 여자도 결혼하면 똑같아질 테니까. 솔직히 나는 가사도우미도 오고, 신랑 앞으로 월세만 몇 백씩 들어와도 그래도 힘들고 억울해. 왜냐면 집안 살림은 여자의 일이고, 아기도 낳아야 하고. 애 낳고 기저귀 갈고 젖 먹이고 다 엄마 일이잖아. 그걸 누가 알아주기나 하니? 다 당연한 엄마의 일일 뿐인걸. 이런 가사 노동, 육아 노동이 오로지 당연한 나의 몫이 되고, 주부가 나의 정체성 맨 앞에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그래. 아직 세상은, 아니 적어도 한국은 대부분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집안도 좋고 예쁘잖아. 굳이 결혼 안 하고 연애만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니가 아깝다. 현욱 오빠가 가난하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지금 내 입장은 누구든지, 어느 여자던지 다 아깝고. 특히 너에게는 대통령을 데려오던 빌 게이츠를 데려오던 그냥 니가 아까워.”


“왜 결혼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는 거야? 자기들도 다 좋아서 결혼해놓고. 그래 놓고 노처녀 되면 또 불쌍하다고 할 거면서 흥! 이제 나도 28살이야. 더 늦기 전에 결혼할 거야.”


“그래.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해. 늙어서 등 긁어주고 병들면 보호자 해줄 사람도 필요하지. 또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아기를 낳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뭔가도 있고. 그래도 정말 너가 결혼한다고 하니 내가 다 속상해. 니가 아깝고.”


“그러지 마. 현욱 오빠가 아까우면 아깝지 내가 뭘 아까워. 솔직히 나는 부잣집 철없는 공주밖에 더 돼? 오빠처럼 현실적이고 든든하게 날 받쳐줄 사람이 어딨어. 내가 고마워해야지. 날 현실로 꺼내 주니까.”


“아이고...... 니가 참 순진한 공주는 공주구나. 니 말대로 그렇게 곱게 자란 철없는 공주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것도 모르는 공주. 어휴... 집에서 반대는 안 해?”


“뭐 탐탁지 않아하긴 하는데. 딱히 드라마처럼 반대하거나 그러진 않아. 엄마는 일단 사람 한 번은 만나보자고 하시고, 아빠는 아무 말도 없고.”


“그래. 인사하기 전에 미리미리 좋게 말해놓고, 또 니가 얼마나 현욱 오빠를 사랑하는지, 이 사람 없으면 안 되는지 단단히 말해드려 혹 부모님이 오빠한테 실수하지 않으시게. 그리고 집에서의 반응도 현욱 오빠한테 말하지 말고.

나 같은 경우 창수 오빠가 너무 고대로 다 전달해서. 지금도 상처가 많아. 솔직히 여자 치고, 예쁘고, 똑똑하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시어머니가 오빠 군 제대하자마자 나 떼어내고 싶어 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섭섭해. 끝내 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 승낙한 것도 열 받고.”


“그래그래. 근데 또 어리고 창수 오빠가 밥벌이를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으셨겠지.”


“그치. 그런 점에서 현욱 오빠는 똑똑하고 자기 밥벌이하니까 그게 참 부러워. 아무리 집안을 보라고 해도 본인이 비전이 있는 게 제일인 거 같아. 연애 때부터 감당하려고 했던 일이지만, 시댁에 약점 잡혀서 기대고 사는 건 정말 쉽지 않다.”


“그래.”


“결혼 준비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짜증 날 거야. 둘이 중심 잘 잡고 진행해. 자잘한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케이블 티비의 토크쇼 같은 대화를 끊고 싶어진 민영이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영이는 예정보다 일찍 지은이네 집을 나섰다. 저녁도 먹고, 늦게까지 수다 떨고 싶어 하던 지은이는 서운해했지만, 결론 없는 수다와 화려한 집이 불편했던 민영이는 엄마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민영이는 중간에 현욱이네로 차를 돌렸다. 아무래도 잠깐이라도 보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건물 입구에 경비 아저씨가 민영이를 불렀다.


“새댁. 여기 우편물 좀 가져가요. 너무 많이 쌓여서 누가 보면 빈집인 줄 알겠어.”


민영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하고는 무뚝뚝한 얼굴로 우편물을 들도 엘리베이터에 탔다. 처음에 경비 아저씨가 새댁이라고 부를 때는 현욱이와의 관계가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몇 달째 결혼 준비에 진전도 없는데 계속 새댁이라고 불리니 민망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쩔 때는 남자 집에 들락날락 거리는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런 여자 아니라고 반박도 못했다. 사실 맞으니까. 물론 성인이며,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불법도 아니고 아무튼 내가 누구랑 섹스하든 세상은 상관없고, 당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떳떳해지지는 않았다.


민영이는 현욱이가 아직 오지 않은 빈 집에 들어갔다. 출근한 현욱은 아직 집에 오지 않았나 싶었다. 민영이는 거실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1인용 의자에 앉아 우편물을 정리했다. 몇 개의 편지는 뜯어 스팸을 확인하고 버렸다.


괜히 마음이 침침했다.


민영이는 좁은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조금이라도 더 집을 정돈하려고 애썼다.


결국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작은 집 꾸미기를 검색했다.


인터넷으로 부엌에 깔 매트도 주문했고. 욕실에 둘 칫솔꽂이도 주문했다. 한참을 그렇게 놀고 있는데 현욱이가 왔다. 현욱이는 지친 모습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앉아서 의자에 앉은 민영이의 무릎에 등을 대고 앉았다.


“늦게 왔네. 토요일인데도 너무 늦었어.”


민영이가 소파에 앉아 현욱이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응, 아무래도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휴~ 지금은 내가 한가하니까 오빠 스케줄 맞춰주지만. 조만간 파견 나가게 되면 얼굴 보기도 힘들겠다.”


“어쩔 수 없지, 다들 그렇게 사는걸.”


“빨리 결혼하자. 그래야 얼굴 보고 살겠어.”


“알았어. 일단 시험 끝나고 말하자. 재촉 좀 하지 마.”


민영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입을 막는 현욱이가 얄미웠다.


“택배 몇 개 올 거야. 집이 너무 삭막해서 꾸미게 소품 몇 개 샀어.”


“그래.”


현욱이가 무심한 듯 말했다.


“근데 이집 계약이 언제까지야?”


“그건 왜?”


“계약 끝나는 거 맞춰서 집 알아봐야지. 다음엔 신혼집이 될 테니까 같이 알아봐야 할 거 아냐. 그때 맞춰서 날짜도 잡으면 좋을 거고. 여기서 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계약기간 얼마 안 남았으면 내 돈 보태서 조금만 더 넓은데로 가면 좋잖아.”


“휴... 어차피 지금 2년째 살고 있어서 묵시적 계약 연장 상태야. 그냥 두어 달 전에 말만 하면 돼. 근데 정말로 나 머리가 아파. 이사니 신혼집이니 그런 거는 나중에 말하면 안 될까?”


민영이는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멈췄다.


“에이 그런다고 삐졌어? 그러지 마. 내가 말했잖아. 이제 시험 한 달 남았어. 시험 끝나고 인사하고 그때 이야기 하자. 조금만 참아. 부탁이야. 지금은 니가 뭔 말을 해도 내 귀에 안 들어와. 그리고 계속 주물러줘. 예쁜이가 안마해 주니까 피로가 싹 풀린다.”


민영이는 입을 삐죽이며 다시 어깨를 주물러줬다. 현욱이의 턱에 수염이 삐죽 튀어나와있었다. 토요일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민영이는 현욱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 집에 갈래.”


민영이가 가방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욱이는 말없이 따라 일어나서, 민영이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왜? 나 혼자 갈게. 피곤할 텐데 집에 있어. 또 어떻게 오려고?”


“택시 타고 오면 돼.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민영이는 피~이 하면서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차를 몰았다.


“민영아, 무슨 말 좀 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결혼 이야기하지 말라니까. 딱히 할 말이 없네.”


현욱이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어이고, 그래그래 말해봐. 결혼 이야기던 뭐던 하고 싶은 말 있음 해. 입 다물고 있으니 답답하다.”


“히히히. 그럼 말할게. 오빠 우리 집 보러 다니자.”


“집?”


“응, 아까 말했지만, 오빠 사는 데서 신혼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좁긴 좁은 것 같아서. 내가 4천 정도 저금한 거 있어. 그거랑 지금 집 보증금이랑 합치면 조금 더 넓은 데 구할 수 있을 거야. 13평만 돼도 괜찮을 거 같아. 지금 오빠 집에서 장롱 둘 정도만 넓어지면 될 테니까. 그래도 둘이 사는데 장롱은 있어야지. 봄 되면 집값이 많이 오른데. 지금부터 알아보면 겨울에는 옮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전세가 귀하다니까 미리 알아봐야지 싶어서. 신혼을 월세로 할 수는 없으니까.”


“민영아, 너 13평이 얼마인지 알아? 13평짜리 집 봤어?”


“아니. 근데 지금 오빠네가 7평이라면서, 13평만 돼도 지금 집의 두배니까 많이 넓어지겠지. 혼자서 7평에 살기 괜찮으니까 둘이서는 13평이면 충분한 거 아니야? 왜?”


“휴~. 막상 13평 같은 집 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거야. 너는 그렇게 좁은데서 못 살아.”


“왜 그렇게 말해? 나 할 수 있어. 부담되면 지금 오빠 방에서도 살 수 있어. 사실 내 짐 별로 없어. 옷 몇 개뿐인 걸. 오빠만 있으면 돼. 집 넓어 봤자 청소만 힘들고 관리만 힘들지 머. 어차피 맞벌이하면 집에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되는 데 뭐.

게다가 내가 살림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어. 그냥 빨리 오빠랑 함께 살면 돼. 당당하게 한 집에서 자고, 우리 집에 사위로 오빠 데려오고 그게 중요한 거야.”


“에휴...... 살아보면 그게 쉽지 않아.”


“뭐가? 오빠 한 달에 300 정도 벌지? 나는 한 달에 400 정도 벌어. 둘이서 700만 원, 아니 반 내림해서 600만 원 번다 치자. 작은 돈 아닌데 뭐가 문제야.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도 아끼고 살면 일 이년이면 1억은 그냥 모을 거야. 애만 늦게 낳으면 돼. 피임 잘 해서 몇 년 뒤에 아기 낳으면 돼지 머. 남들 월급 200만 원으로 4인 가족도 산데. 그거 생각하면 우린 둘 다 전문직에 겁낼게 뭐 있어. 게다가 젋은데.

오빠는 자꾸 나중에 말하자 하는데 나중에 말한다고 뭐 바뀌는 거 있어? 데이트 비용만 나가지. 빨리 결혼해서 아끼고 돈 모으는 게 남는 거 아냐?”


“너 정말 13평 좁은 방에서 살면서 돈 모을 수 있어? 철없는 소리 하지 마. 먹고 사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네가 알아? 안 살아보고 그렇게 말하지 마.”


“살 수 있어. 내가 편하게 살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돈 쓰면서 살지 않았어. 철마다 옷 한 벌 정도 쓸 뿐이고, 그것도 안 할 수 있어. 자꾸 내가 못한다고 하는데 왜 자꾸 그래? 오빠가 자신 없는 거 아냐?”


“그래! 내가 자신 없다.”


현욱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자신 없다고, 나는 니가 저렇게 좋은 고급 아파트 살다가 아파트도 아닌 단칸방에서 사는 거 싫어. 이렇게 외제차 몰다가 중고차 몰고 다니는 것도, 아니 어쩌면 아예 차를 없애야 할지도 몰라 그런 것도 싫고, 백화점 다니면서 쇼핑하다가 시장 다니는 것도 싫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준비해서 최대한 너 편하게 살 수 있을 때 그때 너 데려오고 싶어.

솔직히 너 버스 마지막으로 탄 거 언제야. 맨날 택시만 타고 다니고, 백화점 아닌 데서 옷 사본 적 있어? 없잖아. 나를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작은 원룸 따위 구경도 못해봤잖아. 그게 나는 속상하다고 내가 싫어. 너 그렇게 만들기 싫어!”


현욱이가 소리쳤다. 민영이는 깜짝 놀랐다. 운전대를 흔들 뻔할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현욱이가 그 정도로 나를 생각하고 위해준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민영이는 입을 딱 다물었다. 소리치는 현욱이가 무섭다기보다 본인을 그렇게 생각해주는 현욱이가 고마웠다. 민영이는 몇 분 동안 현욱이가 진정할 수 있게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현욱이가 숨을 고르고 나서야 침착하게 말했다.


“오빠. 고마워 날 그렇게 생각해줘서. 알았어. 기다릴게. 나도 더 아끼고 돈 모을게. 오빠 혼자 애쓰지 마요. 나 바보 아니고, 능력 있어. 내가 오빠 옆에서 도와 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현욱은 난생 처음 여자에게 소리 지른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화가 나서 속이 울렁거렸다. 민영이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했다. 차가 멈추자 현욱이는 차 문을 열였다. 가을바람이 들어와 현욱의 팔에 소름이 송송 돋았다. 현욱은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미안해. 내가 일도 많고 바쁘고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


“괜찮아. 괜찮아요.”


현욱이가 민영이의 손을 잡았다. 민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이를 집에 들여보낸 현욱은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침에 보던 책을 찾았지만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민영이가 정리한답시고 치운 것 같았다. 민영이에게 전화해서 어디 두었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참았다. 오늘은 더 이상 민영이와 말을 하기 싫었다. 현욱은 민영이에게 카톡을 했다.


[나 들어왔어. 잘 자.]


[오빠. 잘 자요. 내일 오빠 일어나면 갈게. 푹 자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미안하다.]


[그러지 마. 오빠가 왜 미안해. 오빠처럼 똑똑하고 능력 좋은 남자가 괜히 나 같은 여자 만나서 고생하는 거지. 잘 자요. 내가 내일 맛난 거 해줄게.]


[그래 잘 자]


현욱은 핸드폰을 닫았다.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알람명이 통장정리였다. 오늘은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었고 월세를 내는 날이었던 것이다.


현욱이는 핸드폰으로 은행에 접속했다.


월세 70만 원

핸드폰비 10만 원

관리비 15만 원

차 할부 30만 원

기름 값 30만 원

밥값, 커피 값 등 생활비 50만 원

보험 20만 원

그리고 저금 50만 원

카드 할부 20만 원,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쏙쏙 빠져나갔다. 그래도 특강비가 들어와서 저축을 할 수 있었지, 특강비 없는 달에는 저금도 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사실 적금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현금으로는 돈 천 만원도 없는 것이 현욱이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아직 준비는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부모님 보험이라도 들어놔야 두 분 노후에 병원비 걱정을 덜 수 있을 텐데, 솔직히 매달 나가는 돈이 엄두가 안나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민영이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결혼에 쓸 돈이 없다. 민영이는 주말이면 현욱의 집에 와서 신혼부부 코스프레 하면서 놀고, 혼자 가계부 쓰면서 결혼의 꿈에 부풀었지만 그걸 보는 현욱이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민영이는 사람이 하루 사는데 돈이 얼마가 드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달 숨만 쉬어도 나가야 하는 전기 요금, 수도 요금, 세금 같은 것의 존재를 모르는 공주였다.


물론 똑똑하고 착한 아이고 본인이 뱉은 말이 있으니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 결혼해도 열심히 노력할 여자였다. 하지만 그 노력이 얼마나 갈지, 언제 지칠지 현욱은 알 수 없었다. 당장 현욱의 엄마만 해도, 부잣집 사모님으로 우아하게 살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이혼녀 타이틀까지 달게 되니까 창피한 줄 모르고 악다구니하는 시장통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현욱은 민영이가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다.


일단 시험 끝나고 인사드리는 것으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 후엔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몇 달 사이에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현욱은 답답하기만 했다.


알람 소리에 민영이는 눈을 떴다. 두 손으로 꼭 쥔 핸드폰이 울고 있었다. 어젯밤 현욱과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혹시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해서 핸드폰을 꼭 들고 잠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욱의 전화는 없었고 아침이 왔다. 다시 만난 이후, 이렇게 전화 없이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민영이는 기분이 착잡했다.


거실로 나가니 언니가 조카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밥을 하고 계셨다.


“예린이 왔어요? 이모한테 뽀뽀.”


“응, 이모 이리 와서 뽀로로 같이 봐요.”


조카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래 같이 보자.”


민영이가 예린이 옆에 털썩 앉았다.


언니가 누워서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야. 지금도 연애 잘 되냐?”


“왜? 잘 된다 왜?”


“기집애. 학원 강사는 늦게 끝나서 연애가 어렵다는데 오래 가네.”


“언니는 퇴근도 못하는 의사랑 결혼해서 살면서 뭘. 오늘도 과부처럼 친정 뽑아 먹으러 와 놓고는.”


“의사랑 강사랑 같냐?”


민영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핸드폰으로 카톡을 열었다.


“야. 엄마가 걱정이 많아. 정말 학원 강사랑 결혼하는 거냐고. 게다가 집안도 결손 가정이라면서. 결손 가정에 고학생에 학원 강사라... 그냥 개천남 아냐?”


“말 좀 가려서 해. 그리고 나 부모님에 대해서 아직 잘 몰라. 이혼했단 사실 하나로 함부로 말하지 마.”


“부모에 대해서 모른다고? 알아야지! 니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분들인데 직업이 뭔지 어쩐지 몰라서 말이 되니? 넌 그 나이에 도대체 무슨 연애를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말조심해. 그리고 오빠 보면 다 알 수 있어. 반듯하고 성실하고 착해. 그거면 돼지 머.”


“쯧쯧쯧. 넌 나를 봐도 몰라? 그게 다가 아니야. 니 형부는 뭐 문제 있어? 사람이야 좋지. 그래도 이상하게 시 짜가 붙으면 달라진다고. 게다가 집안에서 어느 정도는 대줘야 먹고살지. 너무 비빌 언덕이 없으면 힘들어.”


“왜 못 먹고살아? 내가 버는 게 얼만데. 나도 전문직이거든. 게다가 그냥 학원 강사 아니고, 잘 나가는 고등부 강사거든. 그런 강사는 꽤 벌어. 오빠 능력 있어.”


“그래서? 집은 있데?”


“뭐?”


“집은 있냐고. 일단 작아도 내 집 하나는 가지고 시작해야지. 니 형부, 그래도 집은 가져왔다”


“그거 다 대출받은 거잖아. 게다가 아빠가 병원 차려줬고. 결국 아빠가 갚아나가게 해주는 건데, 집이 형부 이름인 게 뭐가 중요해.”


“너 말 다했어? 언니가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잖아. 말 함부로 하지 마.”


“언니야 말로 조심해.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만해. 때 돼서, 정식으로 인사 오면 그때 이야기하고.”


민주는 혀를 쯧쯧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너 잘 생각해. 남자는 돈이 있어야 하는 거야. 능력 있는 남자가 시간도 체력도 되고, 자격 지심도 없어서 살림이라도 도와주지, 능력 없는 것들은 어떤지 알아? 자존심만 더 내세우면서 설거지 한 번 안 도와주고 대접받으려고 한다고. 그 자격지심 안 다치게 하려면 얼마나 떠받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능력 없는 것 하고는 살기 힘들다고.

그리고 그 남자 옛날 그 남자 맞지? 학교 다닐 때 연애하던 그놈. 지금은 재회한 게 낭만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때 니가 헤어진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기억하던 그 시절은 결국 찌질했던 쭈구리 시절일 뿐이야. 괜히 흑역사 꺼내서 과대 포장하지 말고, 다시 만나서 연애했으면 잠깐 즐기고 또 헤어져. 너 이거 내가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먼저 결혼한 선배가 해주는 말이고. 아빠 엄마도 다 같은 생각이니까 잘 새겨들어.”


민영이는 대답도 안 하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한 편으로는 언니가 하는 말이 어쩌면 보편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는 다르다고, 현욱 오빠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증명이 안되니까 더 짜증이 났다.


민영이는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가 나갈 준비를 했다. 자매의 큰 소리에 눈치만 보던 엄마가 민영이를 쫒아왔다.


“얘, 언니한테 화내지 마. 너도 나중에 결혼하고 애 낳으면 언니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거야. 그리고 니가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데려오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니까 속을 모르니 답답해서 그러지. 언니한테 큰소리치고 버릇없이 군건 너니까 나중에 언니한테 사과해. 알았지?”


“싫어요. 아무튼 나는 나갈 거예요.”


민영이는 대충 대답하며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민주는 민영이가 나가는데 모른 척 조카 옆에 누워 핸드폰만 들고 있었다.


“늦을 거예요.”


민영이가 민주를 쏘아보며 엄마한테 말 한마디 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앉았다. 그런데 갈 데가 없었다.

현욱 오빠는 늦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가서 깨우고 싶지도 않고, 강아지처럼 조용히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했다. 그러다가 한 글귀를 발견했다.


[좋은 학교 다니는 남자 찾지 말고, 네가 좋은 학교를 다녀라. 좋은 차 가진 남자를 찾지 말고, 네가 좋은 차를 가져라. 돈 많은 남자를 찾지 말고, 네가 스스로 돈을 벌어라. 네가 가진 게 없으면서 상대에게 바라지 말아라. 그리고 그것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를 절대 무시하지 말아라.]


방송에 나오는 사유리란 사람의 엄마가 한 말이라고 했다. 민영이는 이 글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는, 우리 가족은 교양 있고 멋진 가족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재벌도 아니고, 아빠도 자수성가했기에 조건을 따지는 속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사유리 엄마처럼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건을 따지는 가족들을 보니 너무 실망스러웠다.


억울하고 속상했다.


가족들에게 당장이라도 자랑스러운 현욱 오빠를 데려와서 인사시키고 싶었다. 정신이 바르고 성실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 옆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민영이는 살면서 마음먹어서 못 이룬 것이 없듯, 이 사랑도 이룰 수 있을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감이 커진 것이다.


갑자기 민영이는 현욱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민영이는 손가락의 반지를 한 번 돌리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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