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현욱이가 웅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오빠. 지금 12시야. 아직도 자?”


“응.. 어제 너무 늦게 자서. 일어나야지.”


“그래도 안 늦어?”


“안 늦어. 출근은 2시잖아. 이제 일어나서 천천히 준비하고 가도 돼.”


“밤늦게까지 뭐했는데.”


“옮길 회사도 알아보고, 과외도 알아보고, 바빴어.”


“흠...... 난 점심시간이라 전화했어. 얼른 일어나서 밥 챙겨 먹고 출근해.”


“그래, 그럴게.”


민영이는 전화를 끊고 팔짱을 꼈다.


해가 바뀌었다.


현욱이는 일반 고3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오후 출근, 새벽 퇴근으로 생활 패턴이 확 바뀌었다. 게다가 토요일, 일요일에 주말 모두 수업을 해야 했다. 쉬는 날은 주중 하루뿐이었다. 그 와중에 민영은 경기도 부천으로 파견근무가 결정되었다. 강남에서 부천까지 출퇴근 시간이 두 시간이 더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난생처음 야근까지 해야 할 정도로 바빠졌다.

사실상 점심시간 맞춰 전화 통화하는 것이 유일한 데이트였고, 실제로 만나서 데이트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도 어려워졌다.


그런데 그 귀중한 점심 전화 테이트마다 현욱이는 퍼져 잠자고 있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민영은 피곤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밤 1~2시에 잠이 든다면, 10시에는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12시가 넘어서까지 자는 것은 결국 게으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났다. 게다가 민영은 잠깐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점심시간을 기다리는데, 현욱은 별생각 없이 편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민영은 회사 건물 구석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회계사님, 여기 계셨군요. 점심 드시러 가시죠.”


민영에게 회계를 맡긴 회사의 부장님이었다. 중소와 중견의 경계에 있는 회사였다. 회계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민감한 사항이 바뀌기 때문에, 여러모로 민감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하는 내내 부장님이 바로 옆에 붙어서 편의를 제공한다는 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민영은 중년의 남자가 가까이에 계속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민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장님을 따라갔다.


솔직히 민영은 파견을 나가는 것이 싫었다. 회계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만, 그냥 아빠 사무실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없었고, 힘들 것이 뻔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빠 회사에 붙어 있으려면 아빠한테 잘 보여야 하는 부분도 있고, 나중에 회사 운영할 때를 생각하면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니까 끝까지 반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길어진 출퇴근 시간과 일을 맡긴 회사에 대한 책임감과 그에 비해 미숙한 실력과 낯설고 불편한 사무실 등 모든 것이 민영에게는 스트레스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짜증 나는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입맛도 다르고, 대화할 거리도 아저씨들과의 점심 식사는 저절로 소식을 하게 만들었다.


매일 점심을 같이 먹던 김부장님, 승민씨, 이회계사님이 정말로 그리웠다.


그때 전화가 왔다. 지은이었다. ‘앗싸.’ 민영이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부장님께 말했다.


“부장님, 저 정말 중요한 전화가 와서요. 통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저 그냥 천천히 통화하고 샌드위치 사 먹을게요. 죄송해요.”


“그러실래요? 그럼 미스김에게 샌드위치 준비해 두라고 할게요. 이따 봐요.”


민영이는 불편하다고 직접 사다 먹겠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부장님은 성큼성큼 가버렸고 전화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민영이는 전화를 받았다.


“응, 지은아. 잘 지냈어?”


“그럼, 나야 잘 지냈지. 얘, 아침에 내가 보낸 동영상 봤어? 우리 애기 뒤집었다.”


“어머 정말? 아직 못 봤어. 축하해. 많이 컸네.”


“엄청 신기해. 용을 쓰면서 뒤집는데, 본인도 재미있는지 아주 즐거워하더라니까. 따박따박 발달과정도 책에 나오는 대로 잘 하고, 참 신기해.”


“그래. 신기하네.”


“그치? 근데 나...... 이제 내 새끼 떼놓고 어떻게 일하러 가냐.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


“그래도 애 보는 것보다 일 하는 게 쉽대. 게다가 넌 애기 잘 봐줄 친정 엄마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낳아보니 떨어뜨리는 게 쉽지 않아. 너무 예뻐. 휴...... 고민이야. 애 안 봐주셔도 좋으니 부모님이 자기 생활비나 벌면 좋겠어. 적어도 일 년만, 돌까지만이라도 내가 기르고 싶어. 산후우울증인가? 왜케 자꾸 우울해지는지 원.”


“그땐 다들 그렇데. 너무 우울해하지 마. 그래도 넌 좋은 환경이잖아.”


“그건 그렇지...... 얘 민영아. 넌 꼭 준비 다 하고 애기 낳아. 애기 낳고 일하는 거 쉽지 않다.”


“야! 나 결혼도 안 했는데. 뭔 말이야.”


“그래도 애인 있잖아. 난 뭐 결혼하고 애 만들었냐?”


“기집애 아줌마 다 됐네. 이런 말도 하고. 그리고 애인은 무슨, 얼굴도 못 보는데.”


“그래도 항상 피임 잘 해라.”


“아 몰라. 아무것도 안 한다니까. 권태기야 권태기.”


“기집애. 아닌 척 하기는. 큭큭. 점심은 먹었어?”


“그냥 샌드위치나 먹으려고. 아흑~ 정말 파견 나오는 거 힘들다. 사무실에서도 혼자 깍두기 같고 답답해. 같이 파견 온 남자 직원도 나랑 성격도 안 맞고, 불편하고, 미치겠어.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공부해서 자격증 땄나 싶어 엄청 후회도 되고.”


“그냥 경험이니까 조금만 버텨. 어차피 한 두 번 경험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나중에는  아빠 회사에 짱 박혀 있을 수 있다면서.”

“그럴 줄 알았는데. 어제는 아빠가 대뜸 중요한 건 파견하면서 배워야 하니까 몇 년은 파견만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라고 하더라구. 미치겠어. 이게 무슨 전문직이냐. 그냥 아웃소싱이지.”


“쩝. 내가 그쪽을 몰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휴. 정말 쉽지 않아. 맨날 야근이나 하고. 그렇다고 돈을 아주 많이 버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취업이 잘 되는 정도? 요즘에는 공무원 시험 볼까 싶기도 해. 아는 회계사 언니가 이번에 공무원 붙었다는데 본인은 기존보다 일이 편하다고는 하더라고.”


“공무원? 그거 좋지 않나? 공무원 하다가. 나중에 연금 받게 되면 그만두고, 그때 아빠 회사 물려받으면 되잖아. 한 번 해봐.”


“요즘에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긴 한데. 근데 사실 또 공부하고 그럴 생각하면 좀  귀찮기도 하고, 쥐꼬리만 한 연금 외에는 딱히 장점도 없고, 솔직히 일단 연봉이 줄어드니까 막 적극적으로 도전하게 되지가 않아. 지금 아빠가 돈 많이 주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에효, 햇수로 3년 째라 그런가 완전 권태기야 권태기.”


“넌 애인이랑도 권태기고 일도 권태기고 어쩌려고 그래?”


“쩝, 모르겠다. 아이쿠 시간 봐라. 나 들어가야겠다.”


“그래. 파이팅이다.”


터덜터덜 잠바를 여미며 사무실에 들어가자 책상 위에 샌드위치와 우유가 올려져 있었다. 정말 부장님이 미스김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 같았다. 민영이는 점심 심부름을 했을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후덕한 중년의 여직원이 웃으며 민영이와 눈을 마주쳤다. 미스김이었다.


민영이보다 나이가 10살 정도 많은 경리직 직원이었다. 따로 직급이 없어서, 미혼을 핑계로 모두 미스김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민영이는 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미스김은 웃으며 아니라고 천천히 드시라고 말했다.


책상에 앉은 민영이는 샌드위치를 살짝 구석으로 밀었다. 파티션도 없는 사무실에서 다들 조용히 일하는데, 혼자 소리 내며 먹고 싶지 않았다. 민영이는 음료수 병을 따서 마셨다. 갑자기 의도치 않게 다이어트하게 됐다는 생각에 신물이 올라왔다.


9시가 되어서야 민영이는 퇴근할 수 있었다. 눈을 비비며 한 시간을 운전해서 동네에 도착했을 때, 현욱에게 전화가 왔다. 보통은 현욱이 수업을 할 시간이었다. 민영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오빠? 무슨 일이야?”


“응,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지금 쉬는 시간이야?”


“응... 그게... 지금 어디야?”


“나? 지금 막 집에 주차했어.”


“그래? 그럼 10분만 기다릴래? 나 지금 니네 집 앞이거든.”


“뭐? 집? 출근 안 했어?”


“가서 이야기할게.”


현욱이가 전화를 뚝 끊었다. 민영은 뒷목이 삐쭉하니 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욱이는 5분도 안돼서 지하주차장에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민영이의 차에 들어왔다.


“오빠 차는 어디다 놨어? 왜 걸어 들어와?”


“그게...... 민영아 사실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왜 그래? 무섭게?”


“나 차 팔았어. 학원도 그만뒀고.”


“회사를 그만뒀다고? 무슨 말이야 갑자기?”


“공무원 되려고. 오늘 공무원 학원에 등록하고 왔어.”


민영이는 벙 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욱이는 계속 말을 이어서 했다.


연봉이 동결되었고, 파트를 두 군데 뛰어서 급여를 올릴 생각으로 지난달에 파트로 바꿨는데, 과외도, 다른 파트 강사 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는 것, 이런저런 생각 끝에 아직 나이도 젊으니 공무원에 도전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는 것. 그래서 차도 팔고, 집도 빼고 고시원으로 들어가서 일단 목돈을 만들고, 과외 한두 개 하면서, 절약하면서 공무원 준비를 하겠다는 것을 말했다.


더불어 1년 안에 붙을 자신 있다. 2천 만원,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들고 인사드리는 것보다 안정적이고 사회적 인식도 좋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 민영이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더 좋을 것 같다 라고, 현욱이는 몇 번을 연습했는지 줄줄이 막히지도 않고 할 말을 읊었다.


민영은 현욱의 말이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울렁이며 들렸다. 현욱의 마음이 이해도 되지 않았고, 자꾸 딴소리하는 것 같아 한심하고 찌질 해 보이기만 했다.


“갑자기 무슨 공무원이야. 왜 그래? 애들 가르치는 거 적성에 맞는 다면서? 서울대 10명은 보내겠다며?”


“강사로서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 그렇지만 강사는 너무 불안하잖아. 퇴직금도 없고, 연금도 없어, 급여도 일하는 거에 비하면 그다지 높지도 않아. 우리 학원에 40대 선생님들 보면 다들 과로사할 만큼 피곤에 쩔고, 학원에서 잘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쭈글해 보이는지 몰라. 얼마 전에도 수학샘이 결국 강사 그만두고, 호프 집 차렸는데 차라리 그게 당당해 보이더라.”


“휴...... 학생 때 내가 공무원 시험 보랄 때는 화내면서 말 함부로 하지 말라더니, 왜 이제 와서 공무원을 한다는 거야?”


“그땐 공부할 돈도 없었잖아. 그나마 지금은 몇 년 일해서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니까 이제야 학원비 내고, 책값 내면서 일이 년 공부할 수도 있는 거야.”


“후...... 그럼 차라리 조그맣게 학원을 차려. 공부방이 더 잘 된다고 하는 말도 있어, 오빠도 학원보다 과외가 더 좋았다면서. 오빠도 벌써 서른 하나야. 이제 와서 도망가듯 공무원 시험 본다는 게 말이 돼?”


“안 그래도 학원 차릴까 생각은 했는데...... 그럼 넌 공무원 시험보다 학원을 차리는 게 나을 거 같아?”    


민영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처음 보자마자 대뜸 전화번호 물어보고, 덥석 손을 잡으며 자기꺼 하자던 그 박력 있던 남자가 어디 갔는가 싶었다.


“나한테 이렇게 물어볼 거면서. 왜 회사 그만 둘 때는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건...... 어차피 니가 반대하고 싫어할 테니까.”


“그럼 지금은 왜 물어봐?”


“그래도 너가 내 마누라잖아.”


민영이는 입을 열면 쌍욕이 나올까 봐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잠깐 좀 찬바람 좀 쐬자.”


현욱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민영이는 한동안 입을 닫고 직진만 했다. 현욱이는 민영이 눈치만 보며 가만히 있었다. 민영이는 멀리 갈 거처럼 달리더니 결국 현욱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어차피 이따 데려다 줄 거니까 여기로 왔어. 우리 어디 커피숍에 가서 이야기 하자.”


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두 잔 앞에 두고 민영이가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결혼하자.

어차피 오빠가 학원 강사를 하던 뭘 하던, 돈은 내가 벌려고 예전부터 각오했었어. 이래 봬도 나 전문직이야. 평생 웬만한 남자들만큼은 벌 수 있어. 아빠 회사를 물려받을 수도 있고. 아무튼 평범한 가장만큼은 돈 벌 수 있어.


결혼해서 오빠하고 싶은 거 해. 공무원 시험을 보고 싶으면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학원을 차리고 싶으면 학원을 차리고. 과외 조금 하면서 공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오빠가 벌어서 쓰는 건 터치 안 할게. 오빠가 알아서 해. 내가 큰 돈 주면서 뒷바라지는 못하는데, 오빠가 벌어서 알아서 하는 건 아무 터치 안 할 수 있어.

나 회계사 하면서 기업뿐 아니라. 장사꾼들 장부도 엄청 많이 봤어. 가만히 보면 부자들 중에 여자가 월급 받고 남자가 사업해서 큰 돈 만지는 사람들 엄청 많아. 그러니까 그런 마인드로 살면 돼. 내가 기본 월급 받고 오빠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돈 불리고. 아니면, 오빠가 애 보고, 살림해도 되고. 아무튼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무튼 오빠가 공무원 시험을 보던, 학원을 차리던 알아서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 결혼하자.


결혼을 해야, 오빠가 번듯한 곳에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뭐라도 할 거 아냐.


결혼한다고 해서, 오빠한테 가장의 부담 같은 거 돈 벌어오라는 부담 같은 거 안 줄테니까. 바뀌는 것 하나도 없어. 그냥 식 올리고 같이 살면서, 하고 싶은 거 해.”


뜬금없는 민영이의 청혼에 현욱이는 뜨거운 커피잔을 만지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쉽게 대답 못하는 현욱을 보며 민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빠 그거 알아? 오빠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 분명히 나랑 헤어지게 될 거야.

나 시험 볼 때 한 번 경험했잖아. 우리를 위해 미래를 생각하다가, 결국 ‘나’를 보게 되는 거야. 오빠만 생각하게 될 거고, 우린 헤어질 거야.

지금도 그래. 오빠, 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돈 모은다고 했는데. 결국은 나랑 상의도 안 하고 덜컥 회사 그만뒀잖아. 그게 뭐야. 나랑 먼저 상의를 했어야지.

나는 주말에 약속하나 잡는 것도 오빠한테 물어보고 하는데 오빠는 지금 뭐가 중요한지도 잊어버리고, 오빠만 생각하면서 급하게 일만 벌이고 있잖아. 이게 뭐야.

나 또 오빠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오빠도 나 사랑하잖아. 남들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나랑 결혼하고 그다음에 천천히 하고 싶은 거 생각해서 해. 내가 도와줄게. 급한 마음에 일만 벌이지 말고. 그러다 탈 나.”


현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았어. 흠...... 아무튼 공무원은 싫다는 거지.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내가 선택하는 건 다 응원해줄 줄 알았어.”


“오빠!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오빠가 진정으로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당연히 응원해. 하지만 지금은 2천 만원 모으겠다고 한 말 지킬 자신이 없으니까 도망가려고 공무원 시험 본다는 거잖아.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일단 우리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것부터 하나씩 하자. 결혼하고 싶고, 나랑 사랑하고 싶은 거 그건 확실하잖아. 난 식도 안 올려도 돼. 부모님께 통보만 하고, 혼인신고만 하면 돼.

결혼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싶으면 해. 내가 뒷바라지해줄게.”


현욱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아닌 거 같아. 백수로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차라리 어디 아무 데라도 들어가서 직업 가지고 식을 올려야지.”


“그러던지. 그럼 일단 다시 취업을 해. 강사는 금방 취업 되잖아. 대충 식 올릴 때까지만 다닐 학원에 들어가서, 결혼부터 하고, 그다음에 천천히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민영이는 현욱이가 자기 말을 듣는 것 같아서 약간 안심이 됐다. 하지만 현욱이는 단호했다.


“아니야. 그래도 취업은 싫어. 이제 31살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비전 없이 살 수는 없어. 빨리 부자가 돼야 해.”


“휴...... 그럼. 그냥 결혼부터 하자.”


민영이가 대화에 도돌이표가 붙어 있는 것을 느끼며 힘없이 대답했다.


“민영아. 근데 넌 왜 자꾸 결혼부터 하자고 해? 내가 이렇게 가진 게 없는데.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부모님의 반대도 그렇고, 가장이 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야. 당장 니 부모님이 집 안 해주시면, 정말 원룸, 월세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그렇다고 난 처가살이는 못해. 절대 못해.”


“내가 언제 오빠 돈 보고, 직업 보고 결혼하자고 했어? 그런 거 없어. 그냥 오빠가 좋은 거야. 그러니까 지금 결혼해도 좋아. 뭐가 문제야? 그냥 내가 남자라고 생각해. 내가 남자고 오빠가 여자였음 진작에 결혼하지 않았겠어? 취집 한다고 생각해. 괜찮아. 내가 다 먹여 살릴게.”


“너 꼭 무슨 페미니스트처럼 말한다.”


“당연하지. 한국에서 대학 나온 여자 중에 페미니스트 아닌 여자가 어딨어? 무슨 말이 그래? 여기에 페미니스트가 왜 나와? 그리고 고마운 줄 알아. 남자보고 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여자가 어딨어?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그러다가 나도 지쳐서 떠나면 오빠 살 수 있어?

자꾸 오빠가 돈도 없는데, 자존심만 내세우면서 못난 모습 보이면 그때야 말고 난 오빠를 지켜주지 못할 거야. 나도 지쳐간다고.”


“...... 알았어. 고마워. 니 마음 정말 고마워. 알량한 자존심만 아니면 무조건 고맙다고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해서 더 미안해. 그래도 나도 남자잖아. 남자는 자존심 빼면 죽는 거야.

일단 공무원은 안 할게. 니 말이 맞는 것 같아. 괜히 뭐라도 보여주는 거에만 신경 쓰다 보니 니 말 대로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아.

나 며칠만 더 생각해볼게. 취업을 할지. 학원을 차릴지. 진작에 상의할 걸. 괜히 혼자 일 벌이고 여기까지 와서 미안해.”


현욱이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고개 숙인 현욱이가 안타까웠다. 민영이가 손을 뻗어 커피잔을 잡고 있는 현욱의 손을 잡았다.


둘이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6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에, 민영은 눈을 비비며 간신히 일어났다. 차가 막히기 전에 부천까지 가야 했다. 민영이는 최대한 빨리 씻고 화장하고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오늘도 나와 상관없는 남의 회사 장부를 하루 종일 봐야 했다. 그게 그거 같은, 그러나 꼼꼼히 봐야만 하는 암호 같은 문서들이다.


시험 준비할 때만 해도 회계사라는 직업이 매력적이고 적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되고 나니 적성도 안 맞고, 일 자체가 그다지 창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단순하지도 않은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한 따분한 일일 뿐이었다. 그저 요즘 세상에 누가 적성 따져가며 일하고 돈 버나 싶고, 먹고살기도 괜찮고, 전문직 타이틀도 좋으니 꾸역꾸역 버티는 것뿐이다.


다른 날보다 5분 먼저 나와서 그런지 길이 하나도 안 막혔다. 이런 식이면 30분이나 일찍 출근하게 생겼다. 참 신기한 것이 평소보다 10분 늦으면 1시간 지각하고, 5분 일찍 나오면 1시간 일찍 도착한다. 그렇다고 평소같이 나오면 정각에 회사에 도착하지만 대신 길이 막히니까 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아진다.


민영은 빨간 불에 맞춰 차를 세우고 하품을 하면서 어쨌든 3주만 더 버티면 이 회사에는 안 가도 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파견 나가는 회사가 여기보다 멀어진다면 그땐 정말 회사 앞에 월세 방이라도 얻어야지 이렇게 출퇴근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미스김이 먼저 와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민영이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책상에 앉아 모니터 뒤로 몸을 숨겼다. 자기와 상관없지만 나이 드신 분이 빗자루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너무 불편했다. 청소하시는 분이면 편할 텐데...... 작은 회사는 이게 문제였다. 왜 저 분은 저 나이에 십 년째 이런 대우를 받으며 출근을 할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어느새 모두 출근을 완료하고 다들 조용히 일하기 시작했다. 10시쯤 오전 업무의 최고의 집중도를 올릴 시간에 전화가 왔다. 현욱이었다. 민영이는 나가서 받을까 하다가 일에 집중이 끊어질까 두려워 그냥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나야. 통화 괜찮아?”


“응, 말해.”


“나 밤새 생각했는데. 공무원 안 하고 학원 차릴게.”


“그래 잘 생각했어.”


민영이는 전화기 볼륨을 줄여 남자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안 좋아?”


“좋아. 지금 사무실이어서 그래.”


“알았어. 그럼 편할 때 전화 줘. 내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줄게.”


밝아진 목소리로 현욱이가 말했다.


“응, 끊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민영의 통화에 신경 쓰지 않거나,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민영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며 저녁도 굶고 9시까지 일을 한 후에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컴퓨터 전원을 끄고 미스김이 챙겨 준 비타 500을 한잔 들이켜고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 그제야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을 봤다. 스팸 메시지 2개가 도착해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며 현욱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나 이제 퇴근해.”


“응, 난 지금 학원 창업 알아보고 있어. 이게 쉬운 게 아니다.”


“그렇지 세상에 쉬운 게 없지.”


“...... 그러게. 운전할 거지? 집에 도착해서 연락해.”


“응.”


학원은 무난했다. 경력도 있고 투자비용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자영업이 그렇듯이 열심히만 하면 굶지는 않을 것이다. 성실한 사람이니까, 일단 차리고 나면 잘 되겠지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부모님이 환영하지는 않을 테지만, 사실 현욱이가 뭘 하던 환영은 받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는 무조건 반대하는 부모님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차츰 왠지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 있었다. 거래처에, 친구들에게, 친척들에게 체면을 생각하면, 아니. 다 떠나서 당장 지은이는 넓은 집에 가사도우미를 두고 생활하는데, 현욱이랑 결혼하면 원룸 월세에 살아야 하는 것은 확실히 큰 소리로 자랑할 사항은 아니니까. 나부터도 답답해지기 시작하는데, 부모님은 정말 보기 싫으실 것이다.


한숨을 길게 뱉고 민영이는 차를 출발했다.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민영이는 씻자마자 현욱에게 전화를 하며 침대에 누웠다.


“여보세요.”


“응, 잘 들어갔어?”


“응 씻고 자려고.”


“그래......”


현욱이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그냥 좀.”


“왜?”


“생각보다 자본이 부족할 것 같아. 인테리어도 그렇고, 강사료도 그렇고. 내가 영어나 수학이면 모르겠는데. 사회, 논술이잖아. 결국 주 과목은 강사를 써야 하는데 이게 결국 돈이라 말이지. 대출을 받고 싶어도 받을 데도 없고. 가진 돈에 맞춰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좀 막막하네.”


“천천히 생각해. 안되면 다시 취업해서 돈 좀 모아서 해도 되니까.”


민영이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현욱이가 살짝 삐진 것이 분명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마 다시 취업하면 된다고 쉽게 말해서 그랬을 것이다. 민영이 역시 숨소리로 짜증 나는 기분을 전송했다. 그런 말 하나하나 예민하게 구는 것을 피곤한 오늘은 받아줄 수 없었다.


“많이 피곤해?”


“응.”


“그럼 자. 내일 봐.”


“그래. 잘 자.”


민영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잠에 빠져 들었다.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끝이 없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