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목이 말랐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답답했다. 입고 자던 코트를 벗어 바닥에 내려놨다.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깜깜했다. 천천히 부엌으로 가서 물을 먹었다. 큰 컵에 반잔을 꿀꺽 삼키고, 다시 컵 가득 찬 물을 받아 쭉 마셨다.


빈 식탁에 물 잔을 내려놓았다. 물 잔에 맺힌 찬 이슬이 싱크대위로 떨어졌다.


방에 들어와 핸드폰을 보았다. 현욱 오빠에게 전화가 두어 통 와 있었다. 마지막 전화는 5분 전에 걸려온 것이었다. 현욱 오빠로부터 카톡도 와 있었다. 나는 현욱 오빠의 전화번호를 차단시키고, 카톡 앱을 삭제했다. 페이스북과 카스도 다 계정도 다 날려버렸다.

  

화장실로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젖을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방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 창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


하늘이 깜깜했다.


끝이다.


이러니 저러니 어차피 이별이다. 정리할 것도, 변명할 것도, 형식적인 인사도 모두 다 필요 없다. 대답도 들을 필요 없이 나는 확실하게 이별을 전한 것이다.


나는 창문을 꼭꼭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꼭꼭 쫌 맸다. 침대에 모로 누웠다. 젖은 머리카락 한 올이 툭 빰에 떨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민영아. 오늘 결혼식 간다면서. 아빠가 준비하래.”


“네.”


오늘은 아빠랑 승민씨 결혼식에 가는 날이었다. 나는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엄마가 선식을 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왜요?”


“어제 뭐 했는지 말 좀 해줘. 술도 같이 마셨어? 남자가 그만큼 맘에 들었어?”


“술은 마셨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뭐든 결정되면 말씀드릴게요.”


“처음 만나서 술까지 마셨으면 맘에 드는 거 아냐? 그냥 말해봐. 잘 생겼어? 성격은 어때 보여?”


“몰라요. 한 번 만나서 뭘 알겠어요. 그냥...... 휴...... 엄마, 그냥 좀 나 피곤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리고

엄마가 너무 이렇게 보채면, 정말 될 것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좀 냅두세요.”


나는 뾰족하게 엄마를 공격했다. 엄마가 입술을 내밀며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일도 너무 많고, 정말 너무 피곤해요.”


“알았어. 밥 먹어.”


엄마는 밥을 푸며 말했다.


“금방 결혼식 가면 밥 먹을 건데. 안 먹을래요.”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장은 화려했다. 화환이 줄 지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예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빠와 같이 신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축의금을 냈다.


승민씨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승민씨 뒤에 서서 사진을 찍고 가면, 다름 사람이 승민씨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마치 놀이동산에 있는 미키마우스 간판 같았다.


나와 아빠를 보자 승민씨가 바로 인사를 해주어서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후, 아빠는 집에 가신다고 했다.


“내가 단체 사진 찍을 필요도 없고 하니 나는 이제 그만 갈게. 너는 동료들하고 사진도 찍고, 밥도 먹고 해.”


아빠는 명령을 내리고 집으로 가셨다.


아빠가 집으로 가시자. 이회계사님 김부장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둘은 축의금을 내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셋은 식장으로 들어갔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그러게요. 이제 파견도 끝나가니까 조만간 또 맨날 볼 거예요.”


“그래, 빨리 그 날이 오면 좋겠어요. 사무실이 적적해요. 점심시간도 허전하구요.”


소곤소곤 인사를 하다 보니, 결혼식이 시작됐다.


신랑이 입장하고, 신부가 입장했다.


눈이 뜨거워졌다.


'울면 안 돼!'


나는 숨을 고르며,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흘러나오지는 않았지만,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머리카락을 메만지는 척하며 눈가를 훔쳤다.


그래도 수습할 틈도 없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결혼식을 열심히 보고 있는 김부장님에게 ‘화장실 다녀올게요’라고 속삭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흘러 화장을 번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술을 씹었다.


그렇게 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남은 눈물을 바닥에 버렸다.

    

결혼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현욱이를 잡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원했던 이별을 했을 뿐인데, 왜 눈물이 나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진정시키고 나니, 내가 휴지를 툭툭 뜯어 바닥에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장실 바닥은 내가 흘린 침과 눈물과 뜯어 버린 휴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화장실에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닦고, 코를 팽 풀어 휴지를 던지고, 화장을 고쳤다.


다시 식장으로 갔다.


아직도 주례가 한창이었다.


“예쁘지? 신부가 너무 어려서 아깝지만, 보기는 좋다. 그치?”


김부장님이 속삭였다.


나는 답으로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런데 눈물이 또 툭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볼의 눈물을 훔치고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눈물이 멈췄다.


사진을 찍고, 나는 김부장님과 이회계사님과 따로 마련된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스테이크를 비롯한 음식들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 때문에 소란스러웠지만, 그래도 구석자리라 수다를 떨기에는 괜찮았다.


“우리 진짜 오랜만이네요. 얼마만이야.”


“그러게 두 달 만이지요? 다다음주에는 다시 본사로 갈 거예요.”


“파견 어때요?”


“모르겠어요. 그냥 다 불편해요. 나이 많은 분들이 회계사님이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면서 친절하게 해주시는 것도 불편하고, 일도 더 긴장되구요. 그냥 얼굴 안 보고 서류만 보고 할 때는 학교 다니는 것처럼 별생각 없었는데, 일 맡기는 사람 얼굴 보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여러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사실 내가 뭐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왠지 잘해줘야 한다? 그런 압박도 받는 것 같구요. 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암튼 엄청 짜증 나요. 빨리 도망가고 싶어요. 점심시간마다 우리 멤버들 생각나구요."


“호호호 처음이니까 그래요. 하다 보면 그냥 다 익숙해져요. 푸대접받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손님 대접받으면서 하는 거니까. 생각만 바꾸면 사실 더 편할 수도 있어요. 민영씨야 아빠 회사니까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나 같은 경우, 어떨 땐 상사와 떨어져서 파견 나가는 게 더 좋을 때도 있거든요.”


이회계사님이 말했다.


“근데 승민씨 집이 부자였나 봐요. 시댁만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친정 쪽도 사람도 많고, 화한도 많고요.”


“응, 승민씨네도 사업이 안정적이라고는 들었어요. 잘 사는 집인 가봐. 승민씨 아버님하고 대표님 하고도 쫌 아는 사이지 않아?

암튼 그래도 시댁이 알짜래요. 집도 몇 채고, 승민시가 여우 같잖아. 잘 골라서 좋은 집에 가는 것 같아. 신랑이 나이 빼고는 딱히 걸리는 게 없는데, 나이도 남자 나이 30 중반이니까 많은 것도 아니고, 승민씨가 뭘 알긴 아는지 싶어. 잘 갔지.”


“그렇군요. 잘 됐네요. 잘 살겠네......”


김부장님이 숟가락을 놓고, 음료수를 마시면서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있지. 승민씨 보니까 따지고 고르는 게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사실 난 이 나이 먹도록 좀 낭만주의자랄까? 조건 보고, 결혼하고 그러는 거 납득을 못했거든.

그런 점에서 난 고르고 고르느라 시집을 못 가는 것도 아니었어요. 어쩌면 오히려 돈 보고 결혼한다는 소리 듣는 것도 싫었고, 사실 친정이 좋은 조건이 아니니까 마지막 자존심으로 더더욱 조건 같은 거에는 눈 감고, 귀 닫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거 너무 안 보고 순수한 사랑 타령을 한 내가 더 바보인 것 같아. 또 그래서 더 남자가 안 붙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얼마 전에 내 친구가 이혼을 했데요. 친구가 그러는데, 남자가 결혼 후에 돈을 한 번도 준 적 없었데요. 힘들게 살면서, 어느 날 보니 사랑이 식었더래. 근데 애들이 있으니까 이혼은 안 해야지 마음먹었데요.

그러다가 작년에 사업을 하겠다고 해서 밀어줬는데, 일 년 새 빚이 어마어마해졌데요. 친구 말이 애들에게 빚은 줄 수 없겠다 싶어서, 바로 이혼 결심이 서더래요.

그러면서, 남편이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든든했으면 행복했을 텐데, 돈이 없으니까 부부 싸움하고, 부부싸움하고 나니까 일에 집중 더 못하고, 그러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악순환이 되는 것 같다고. 또 돈이 없으니까 남자는 자격지심에 억지만 더 부리고, 대우만 받으려고 하고, 시댁에서는 그 와중에도 시짜 유세 부리면서 힘들게 하고...... 차라리 남편이 돈이라도 많으면 돈으로 커버 치고 살 텐데 그것도 안되더라고 체념하듯 말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돈이 많고, 능력 좋은 남자가 건강하고, 체력도 좋아서 집안일도 도와주고, 부인에게 더 너그럽게 잘 해주는 것 같다고. 능력을 보라는 이유가 돈을 떠나서, 그런 여유로움? 그런 거라고 말하더라구요.

승민씨만 봐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결혼 준비 때도 잡음 하나 없이 얼마나 즐겁게 준비하고 결혼하는지 다들 봤지요? 솔직히 부럽더라.

따지고 보면 나 행복하자고 하는 건데 내가 행복하고 만족해 하기 위해서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은 건데, 그러려면 우리가 아마존 밀림에 사는 것이 아닌 이상. 돈이 필요한 거고.

귀찮지 않은 가족도 중요하고, 인품 성품 당연한 거고 다 따지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닌 거야.

우리가 무조건 수능 잘 봐서 일단 좋은 대학 가고 나서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결혼도 남들 말 하나도 틀린 게 없는 거더라구요.”


“맞아요. 그 친구분 말에 동감해요. 나도 돈 때문에 이혼했거든요.”


이회계사님의 말에 김부장님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나 이혼한 거 다 알면서 그래요. 난 시댁이 자꾸 돈을 요구했어요. 내가 벌어서 시댁에 다 주는 꼴이었지요. 가난한 남자였지만, 우리 부부가 전문직이니까.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시댁 사람들은 내가 몇억씩 버는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더군요. 처음엔 그런 시선이 감사했지만. 나중엔 너무 부담되었어요. 그래서 연봉을 사실대로 다 말하고, 돈이 많지는 않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안 믿고 계속 자식 된 도리 어쩌구 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결혼할 때는, 다 감수할 수 있을 줄 알았고, 감수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내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거든요. 그땐 사랑을 증명하는 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 같아요.

바보였지요. 호호. 지금은 참 좋아요. 아이와도 즐겁고, 친정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이제야 행복이 뭔지 생각하면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정말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누군가 만나면 이 사람과 평범한 일주일을 상상해보세요. 전업주부던 맞벌이던 아주 구체적으로 방학생활 계획표 짜듯이 그 일주일을 상상하고 그려보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은 누구하고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 출근길 퇴근길은 어떨지. 집에 와서 남편과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맞이할지. 나는 얼마나 피곤하고 즐거울지를 계산해봐야 해요.

아이고, 내가 간만의 결혼식에 감상적이 돼서, 너무 주절주절 말이 많았네요. 에고 주책이네.”


이회계사님은 길게 말을 늘어놓다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김 부장님이 괜찮다고, 좋은 말이었다고, 고맙다고 하며 이회계사님을 다독였다.


나는 콜라를 쭉 마셨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탄산 때문인지 코가 눈이 먹먹해졌다.


눈가가 붉어졌다. 김 부장님이 나를 바라봤다.


“민영회계사님 괜찮아요?”


“네. 탄산 때문에요.”


민영이가 트림을 하는 척하며, 냅킨으로 눈가를 닦았다. 김부장님은 그래도 나를 가만히 보았다.


“오늘 좀 이상해요. 피곤해서 그런가?”


“네, 좀 피곤해요. 사실 요새 계속 야근하면서 피로가 많이 쌓였거든요. 그건 그렇고 저 화장실 좀 다녀올 께요.”


화장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손을 씻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행복.

행복을 계산하라.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민영씨 괜찮아요?”


이 회계사님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네 괜찮아요. 그게...... 사실 저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그래? 진작에 헤어진 거 아니었어? 우린 예전에 헤어진 줄 알았는데.”


김부장님이 말했다.


“네?”


“그동안 말도 없고, 반지도 빼고 다니길래. 잘 안 돼가나 싶었지.”


이회계사님도 말했다.


“아...... 맞아요. 그동안 헤어지는 기간이었고, 어제 분명하게 헤어졌어요. 꽤 좋아하던 사람이라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이제 깔끔해졌으니까. 후련해요.”


“잘 했어요. 민영회계사님이야. 현명한 선택을 했을 거예요.”


이회계사님이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런데 김부장님이 조심스레 질문을 했다.


“근데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요?”


이회계사님이 눈을 찡긋하며, 김부장님에게 눈치를 줬지만. 김부장님은 굴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눈빚으로 나를 보았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남자가 나한테 말도 없이 회사도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일을 벌이고, 주식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우리 아버지도 사업하시는 거니까. 그 자체는 괜찮은데, 나한테 말도 없이 혼자 결정하고, 일을 너무 벌리고 하는 게 불안해서 못 견디겠더라구요. 게다가 결혼도 자꾸 말이 바뀌고.

그러다 보니 이 남자를 더 잘 알아갈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둘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지고.

모르겠어요. 그냥 그만큼이었나 봐요. 진짜 인연은 아니었나 봐요. 그냥 친구 인연인데, 억지로 연인으로 만든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나는 덤덤한 척 말했다.


“잘 했어요. 주식은 정말 최악이야. 주식 해서 돈 번 사람 하나도 못 봤어.”


“그래요. 잘 했어요. 게다가 젊은 나이에 월급 받을 생각해야지. 편하게 사장이나 하려고 벌써부터 그래.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니니까 잊어버려요.”


둘이 나를 위로하는 말을 계속해주었다.


그때 승민씨가 한복을 입고 식당에 들어왔다. 김부장님과 이회계사님은 신랑 인물이 어쩌고 하면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승민씨의 환한 웃음을 보자, 또 눈물 떨어졌다. 서둘러 냅킨으로 눈가를 훔쳤다. 김부장님이 못 본 척 고개를 돌려주었다. 승민씨가 다가와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고, 우리는 덕담을 해줬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났다. 김부장님이 술 한잔 하자고 나를 붙잡았다. 더 이상은 말을 나누면 위험할 것 같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김부장님, 이회계사님 모두 회사 직원이었다. 아빠에게 말이 들어가는 것도 싫었지만, 직원들이 내 속을 아는 것도 싫었다. 나는 차 운전을 핑계로 간신히 김부장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천천히 집에 들어왔다. 차를 주차해놓고 시동을 껐다. 그런데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어제 선 본 것에 대해 엄마가 계속 물어볼 것이 뻔했고. 아빠 때문에 텔레비전도 내 마음대로 못 보는 집에 기어들어가기 싫었다.


나는 일단 걸어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뒷골목 작은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술 한잔 하기에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테이블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나는 맥주와 마른안주를 시키고, 텔레비전을 켜달라고 했다.


무슨 드라마가 재방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화면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맥주 500을 두번째로 주문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어제 선본 남자였다.


“여보세요.”


“저예요. 결혼식 잘 다녀왔어요?”


“네. 잘 갔다 왔어요.”


“그래요? 지금은 뭐해요?”


“지금은...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 마셔요.”


“호프집이요? 누구랑요?”


“혼자요.”


“네? 왜 그래요? 나 부르지요. 지금 갈게요. 어디예요?”


“아니에요.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일부러 혼자 왔어요.”


“그래도, 여자 혼자 호프집은 좀 위험하잖아요. 내가 갈게요. 귀찮게 안 하고, 집에 잘 가는 것만 도와 줄게요. 어차피 나 술도 잘 못 마시니까 걱정마요...... 혹시?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 네. 헤어졌어요. 근데 그거 때문은 아니에요. 어차피 마음 정리는 다 된 사람이었으니까.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걱정마요.”


“그래도...... 알았어요, 나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요. 집도 가까우니까 걱정 말고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어요. 하하.”


“고마워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남자의 번호를 차단시켰다.


다시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다. 나는 주인을 불러 오뎅탕과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잠시 뒤, 또 전화가 왔다.


지은이였다.


“여보세요.”


“나야. 뭐 물어볼게 있어서.”


“뭔데?”


“현욱 오빠 혹시 월급이 얼마인 줄 알아? 이제 일이 제대로 시작되는 과정인데, 현욱 오빠 급여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대략 알아야 현욱 오빠한테 말을 꺼내지 싶어서. 너는 대충 알잖아. 그치?”


현욱 오빠의 급여 수준을 물어보는 지은이의 목소리가 발랄하니 행복하게 들렸다. 평소 창수 오빠의 험담을 하며 현욱 오빠가 더 좋아 보인다고 말하던 지은이가 아닌 것 같았다. 지은이는 벌써 내 남편의 상사의 부인인 듯 나를 대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내가 그냥 그렇게 꼬아서 듣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난 잘 몰라. 그리고 이제 나랑은 상관없어.”


“무슨 말이야?”


“헤어졌어.”


“에이......!! 진짜야?”


“이번엔 진짜야.”


“뭔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내가 진짜로 헤어지자고 말했고, 오빠도 알아들었어. 진짜 헤어지자고 각자 다른 사람 만나자고 했어.”


“그래도...... 너 맨날 헤어질 거라고 말해 놓고 또 주말이면 만나서 데이트했잖아. 또 만날 거 아냐?”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아무튼. 이제 나한테 오빠 이야기하지 말고, 묻지 마. 당사자랑 이야기해.”


“너 괜찮아? 지금 어디야?”


“괜찮아. 그냥 집 앞에 있어.”


아무렇지 않았는데, 순간 코맹맹이 소리가 살짝 났다.


“뭐야? 울어? 야! 어디야. 내가 나갈게.”


“울기는. 내가 애냐? 안 울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난 애기나 봐. 신경 쓰지 마. 처음도 아니니까 괜찮아. 아무튼 오

빠랑은 이젠 정말 끝이야. 그렇게 알아.”


“정말이야? 내가 뭐 해줄 거는 없어?”


“됐어.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나중에 연락할게.”


“알았어......”


“야! 현욱 오빠한테 연락하지 마. 창수 오빠한테도 오늘 바로 말하지 말고.”


“응, 당연하지.”


“그래. 부탁할게.”


“...... 민영아.”


“왜.”


“너 또 잠수타지 마. 난 현욱 오빠랑 연락 안 해도 상관없어. 너가 내 친구니까. 나는 너를 잡을 거야. 그러니까 연락 끊고 사라지지 마.”


“고마워.”


“정말로 혼자 있고 싶어?”


“응. 정말이야. 혼자 있고 싶어. 전화 끊을 께.”


전화를 끊었다.


소주를 마시고, 오뎅국물을 한 입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또 그 맛이 아니어서 그냥 딱딱해진 오징어를 씹었다.


나는 다시 지은이랑도 헤어지게 될 것이다. 난 지은이가 좋았고 지은이 외에는 친구가 없었지만 돈이 엮인 그들의 관계를 깨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현욱 오빠는 그들마저 없으면 살기 힘들 것이다.


내가 꺼져야지.


나는 오징어를 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내가 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는데, 테이블에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눈물을 훔치는 것도 귀찮아서 눈물이 콧물이 뚝뚝 떨어지게 내버려두었다.


가게에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오다가 나를 슬쩍 보더니 살짝 도로 나갔다.


나 때문에 나간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이 나를 흘겨보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유재석과 김종국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심장이 쾅쾅 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모두들 웃었다.


그래. 행복하기로 했지.


나는 핸드폰 메인 화면에 ‘행복’이라고 적었다.


어차피 현욱 오빠를 다시 잡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않은 가. 이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나는 이제 그만 울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울 이유가 없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 나만.


나는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애썼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눈물을 그치고, 운동을 하고, 화장을 하고, 공부를 하고, 올해에 내년에 뭘 할지 계획을 세우자.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차피 그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또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울 이유도 없다. 울지 말자. 진정하자. 사랑했던 것 그것뿐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울고 있었다.


사랑했던 것 그것 때문에 쉽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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