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아.”
민영이는 한 2초 정도 지은이를 몰라봤다. 짧은 커트 머리에 정장을 입은 지은이는 몇 년 동안 못 본 시간만큼 많이 변해 있었다. 그래도 지은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빛은 그대로였다. 민영이는 지은이를 알아보자마자 반가움과 당혹감과 어색함이 섞인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 웬일이니. 오랜만이다.”
“그래 민영아. 이게 몇 년만이야. 기집애야. 어쩜 나한테도 연락 한 번을 안 하고, 전화번호도 안 알려주고, 너 정말 너무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나 정말 많이 화났었어.”
지은이가 덥석 민영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공부하고 사느라 바빠서 그랬지. 미안해.”
민영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은이가 민영이를 위아래로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붙었구나. 그치? 언제 붙었어?”
“작년에 붙었어. 아직 1년도 안됐어.”
"어휴 그럼 바로 연락을 해줬어야지. 시험도 붙었는데 연락 안 한 거야? 연락 끊긴지가 언제냐...... 어머나! 4년이야. 4년 동안 한 번도 연락도 없이 너무했어. 더구나 붙었는데도 연락도 없고. 나쁜 기집애야."
지은이가 흥분해서 민영이 손을 막 흔들었다.
“나 정말 서운하고 보고 싶었어. 미니홈피도, 페이스북도 다 탈퇴하고, 전화기도 없애고, 이메일도 안 읽고 답장도 없고. 한동안 내가 뭐 잘못 했나 엄청나게 고민하고 괴로웠어. 그거 니가 알아?”
지은이가 갑자기 감정이 복받쳤는지 약간 울먹였다. 민영은 미안함과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미안해. 그땐 정말 공부도 해야 했고, 또....... 아무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니 생각 많이 했어. 시험 붙고는 연락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사는 게 바쁘기도 하고,... 아니 사실은 너무 오래 연락을 안 하다 보니 막상 용기가 안 나서.... 시간 끌다 보니 이렇게 됐어. 미안해.”
감정이 복받치는 지은이를 보자, 민영이도 순간 울컥 뭔가 올라와서 괜히 같이 울먹이며 말했다. 지은은 살짝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야. 그래도 너 이제 페북은 하던데? 얼마 전에 다시 시작한 거 찾았어. 사실 며칠 동안 메시지 보낼까 엄청 고민하는 중이었다구.”
“그래? 보내지 그랬어. 뭐 올리는 건 없는데, 다들 엄청 하니까 그냥 계정만 열어 논거야.”
그때 저쪽에서 누가 달려오며 지은이를 불렀다.
“지은 선배, 빨리요. 교수님들 다 오셨어요.”
지은이는 민영이가 도망갈까 싶었는지, 손을 꼭 잡은 채로 ‘알았어. 금방 갈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을 놓지 않고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터 불러봐.”
민영이는 번호를 불러줬다. 지은이는 통화버튼을 눌러 민영이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번호를 저장했다.
“민영아, 내가 지금 학회가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 아 참, 나도 이제 약사 됐다. 호호 암튼 지금은 가봐야 하고. 내가 내일 오전 중에 전화할 거야. 그러니까 꼭! 받아. 알았지? 아니다. 내일 저녁에 몇 시에 퇴근해? 내가 니 회사 근처로 갈게. 몇 시가 좋아?”
지은이의 진심이 느껴져서 민영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민영이는 감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6시에 퇴근이야. 강남이구. 근데 넌 회사가 어딘데?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아니면 가운데서 만나.”
“아냐 아냐. 내가 갈게. 도망가지나 말아. 내일 7시에 강남역에서 만나는 걸로 하고. 내가 전화할게. 꼭 받고. 나 간다.”
지은은 손을 놓으려다 민영을 와락 안았다. 어색한 서양식 포옹이지만 몇 년만의 반가움과 서운함이 섞인 지은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다. 민영이는 순간 포옹에 놀라 뻣뻣했지만 금세 지은이를 안고 같이 등을 토닥였다.
지은이와 약속한 커피숍 앞에서 민영은 손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세팅한 머리의 볼륨이 다시 살아나게 매만졌다. 그리고 에르메스 스카프도 한 번 매만지고, 샤넬 클러치 백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커피숍에 들어갔다.
지은이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민영이와 눈이 마주치자 전화를 끊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야. 방금 왔어. 회사가 근처야?”
“응, 바로 요 앞이야. 마감이 다가와서 좀 늦었네. 미안해.”
“내가 일찍 온 거지.”
그때 종업원이 다가왔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민영이가 말했다. 지은이도 같은 것으로 달라고 말했다. 종업원이 가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건 뭐, 옛날 애인도 아니고 웃기다. 왜케 긴장되지?”
“그러게.”
지은이의 솔직함에 민영이가 슬쩍 웃었다. 둘은 눈이 맞춰졌다. 둘이 미소를 지었다. 지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험은 언제 붙은 거야?”
“작년에. 햇수로만 2년 차고 아직 1년도 안됐어. 수습 중이야.”
“그 전에는 공부만 하고?”
“응.”
“정말 시험 때문에 나한테도 연락 안 한 거야?”
“......”
“현욱 오빠는 잘 지내고 있어."
“......”
“시험공부 때문에 나한테까지 연락을 끊은 것은 아니지? 현욱 오빠랑 완전히 자르고 싶어서 나한테도 전화번호 안 알려준 거 맞아?”
“...... 맞아.”
민영이 힘들게 말했다.
“그럼, 정말 그게 끝이야? 정말 남자 하나 때문에 나까지 끊은 거야? 그거 말고는 나한테 섭섭한 거 따로 있었던 거는 아니고?”
“아니야, 그런 거 없어.”
민영이는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너한테 뭐가 섭섭해. 그런 거 없었어. 정말 시험공부에 방해돼서 전화기 없앤 것뿐이야. 괜히 너한테 전화하거나 페북 같은 데 들어갔다가는 현욱 오빠랑 부딪힐까 두려웠고. 그리고 그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그땐 나 빼놓고는 다들 즐겁고 막 활기차 보이는데 난 쭈구리였으니까. 모든 게 다 싫어서 연락 안 했던 거야. 그냥 다 싫었어.
그러다 시험 붙고는 연락하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너무 오래 연락을 끊었으니까. 쭈뼛쭈뼛하게 되더라. 이메일도 알고 연락하려면 할 수는 있었는데 한 번 타이밍을 놓치니까 그게 쉽게 안돼서...... 미안해. 그래도 사실은 정말 조만간 연락해야지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어. 더 늦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미안해. 너무 늦어서."
민영이는 창수네 커플과 자기네 커플을 비교했던 한 순간의 과거를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휴~ 너 잠수 타고 너무 힘들었어. 현욱 오빠 때문이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내가 알기로 그래도 내가 니 베스트 프랜드인데, 정말 연락을 딱 끊으니까 너무 속상한 거야. 배신감도 들고, 걱정도 되고, 내가 뭘 잘못했나 고민도 했고. 정말 한동안 진짜 힘들었어.
근데 나도 약사고시 재수했거든. 그때 시험에 집중하면서 조금 니가 이해가 되긴 하더라. 이런 시험 준비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싶더라. 나도 얼마 전에 겨우 붙어서 이제 체면 차리게 된 거야."
“어머, 근데 니가 시험에 떨어졌어? 너 같이 똑똑한 애가?"
민영이는 깜짝 놀라 물었다. 지은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천재라도 된다니. 휴학도 오래 했고, 창수 오빠랑 놀면서 공부했잖아. 다행히 정신 차리고 재수해서 붙은 거야. 오빠가 나 시험 준비할 때, 고생 좀 하긴 했지.”
“창수 오빠는 잘 있고? 참 결혼은 했어?”
“호호홍,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우와! 진짜? 결혼? 축하해!!! 어머나 웬일이니. 근데 생각보다 늦었네? 졸업하면 바로 한다고 그랬어서 난 벌써 결혼했겠다 생각했었거든, 군대 다닐 때부터 양가 다 알고 그랬으니까.”
“휴~~. 그래, 이제야 한다. 어휴... 말도 마. 결혼 승낙받는 거 진짜 힘들었어. 오빠 부모님 믿고 휴학까지 하고 창수 오빠 군대 기다렸는데, 제대하고는 슬쩍 약사 돼야 결혼시킨다고 말 바꿨잖아. 근데 떨어졌지.
내가 약학 고시 떨어지니까. 글쎄 오빠한테 좋은 집안 여자들 선보라고 은근히 압박하고... 그만큼 오빠도 흔들려했고. 그 와중에 약학 전문대학이니 뭐니 하면서 시험도 언제 바뀔지 몰라서 엄청 머리 아팠지.
그래서 시험공부하면서 헤어지니 뭐니 한창 짜증 많이 났었어. 그러다가 결국 시험 붙고 바로 결혼하려고 하니까.
젠장 이번에는 창수 오빠가 돈을 벌어야 결혼시킨다는 거야. 사실 오빠가 포토 스튜디오를 열긴 했지만 사실 자기 용돈벌이도 못할 정도였거든. 그니까 그 말은 결국 나 같은 며느리 싫다는 거지.
사실 처음에는 창수 오빠한테 똑똑하기만 한 며느리면 된다고 그러니까 약사만 되면 결혼하라고 좋아하셨던 건데. 막상 창수 오빠한테 똑똑하고 부잣집 딸내미들 선자리가 들어오니까 마음이 변하는 거지. 내 친정은... 니가 알지 모르지만 지금 그냥 알거지거든.
암튼 내가 약사도 됐는데 시댁에서 말을 바꾸면서 결혼 안 시키려고 하니까 너무 화가 나서 헤어지자고 했었어. 그러니까 창수 오빠가 부모님한테 집 나온다고 협박하면서 설득했거든. 그래도 오빠가 의리는 있더라. 문제는 집을 나가건 말건 안된다고 반대해서 설득이 어려웠는데.
근데...... 결론은...... 나 임신했어."
“임신?”
“응. 임신했어. 그래서 결혼해. 호호.”
“임신?”
민영이가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기집애 조용히 좀 해. 애 놀란다. 진짜로 애 놀란다니까.”
지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허, 야... 내가 진짜 놀라서. 이야 축하해. 진짜 축하해. 얼마나 됐어? 근데 너 커피 마셔도 돼?”
“안되지. 하루에 한잔은 괜찮다지만 그래도 안 마시지. 그냥 향기라도 너무 마시고 싶어서 시킨 거야. 나 지금까지 한 모금도 안 마셨어. 호호.”
“헐...... 축하해. 창수 오빠 엄청 좋아하지?”
“좋아하지. 첨에 좀 놀라긴 했지만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둥 딸바보가 대세라는데 트렌디하다는 둥, 혼자 좋아서 난리야.”
“부모님들도 좋아하시고?”
“뭐...... 친정은 좋아하고, 시댁은...... 안 좋아하면 안 되지. 자기 핏줄인데. 암튼 너 내 결혼식에는 올 거지? 너 초대하려고 얼마 전부터 내가 엄청 연락처 구하려고 구글 뒤지고 페이스북 뒤지고 한 거야.”
지은이가 시댁을 언급하며 본인도 모르게 차갑게 비꼬는 투로 말해놓고는 놀랐는지 화제를 돌렸다. 민영이는 그 비꼬는 말을 느꼈지만 꼬치꼬치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그럼 가야지. 언제야?”
지은이가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냈다.
“3주 남았어. 5월 10일이야. 꼭 와야 해. 왜냐면 부케는 니가 받을 거니까.”
“부케?”
“그래 부케. 내 부케 니가 받아야지 누가 받아? 난 너 아님 부케 안 던지려고 했어. 그래서 페이스북까지 뒤진 거라니까. 그런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이메일을 보낼까 어쩔까 싶어서 며칠 고민했는데 그때 널 만난 거야. 이거야 말로 운명이야. 니가 받아야 해.”
민영이가 당혹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너 친구 있어?”
민영이가 대답을 못하고 지은이를 바라봤다.
“너 지금 친구 있냐고? 나랑 연락 안 하는 동안 너 베스트 프랜드 만들었어? 난 없었어. 내 고등학교 시절, 화려했던 스무 살을 함께한 너 외에는 나 지금은 딱히 절친 없어. 솔직히 너도 마찬가지잖아. 오랜만에 만났다고 어색해질 거 아니잖아. 우리 아직 친구 아니야?"
지은이의 솔직함에 민영이는 많이 놀랐다. 그리고 본인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지은이가 정말 고마웠다. 갑자기 민영이는 정말 친구 하나 없는 본인에게 이런 우정이 와준 것에 감격했다. 민영이가 눈물을 한 방울 툭 흘렸다.
“그래, 나 친구 없다. 너 뿐이다. 기집애야. 알았어 부케 그거 받으면 될 거 아냐. 고맙다고.”
지은이가 눈물을 못 본 척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에이 썅.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마셨네. 근데 맛없다. 젠장. 이럴 땐 소주를 한잔 같이 해줘야 하는데. 야 근데 나 지금 욕했냐? 휴... 그럼 안되는데. 애기가 들었으면 어떡하지?.”
민영이도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잔을 들었다.
“걱정 마. 욕 안 했어. 그 정도야 뭐, 암튼 술 대신 커피로 짠이라도 하자.”
둘은 식은 커피잔을 들어 건배를 하곤 쿡쿡 웃었다.
[집에 다 왔어. 이제 엘리베이터야. 정말 오랜만에 만났어도 그대로라니 우리의 우정이 감사하다. 지금부터 나는 부케 받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몸조리 잘해. 니가 아기를 낳는다니!!! 축하해^^ 몸조리 잘하고, 바쁘겠지만 시간 날 때마다 보자. 내가 달려갈게.
그리고
고마워]
카톡을 다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자 뽀로로 노래가 크게 들렸다. 예림이가 소파에 앉아 뽀로로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소파 바닥에 앉아 사과를 깎아 예린이 입에 넣어주고 있고, 아빠는 그 옆에서 신문을 보고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언니는요?”
“운동 갔어. 요즘 다이어트하잖아.”
“네"
민영이는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린 예린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에 들어갔다. 씻고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민영이는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그 사이에 지은이가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 페이스북에 놀러 와서 결혼사진 좀 봐주라.]
민영이는 싱긋 웃으며 지은이의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몇 년만에 본 창수 오빠는 살이 좀 쪄서 그런가 좀 더 느긋해 보였다. 사진 속의 지은이도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언니의 결혼사진과 비슷한 웨딩 사진들을 쭉 훑어보면서 민영이는 대충 예뻐 보이는 사진들에 [예쁘다. 축하해. 부럽다] 등등의 코멘트를 달았다.
그렇게 쭉 내려가다 현욱의 코멘트를 보았다.
[일요일 결혼식이라 다행이다. 사회 맡겨줘서 고마워. 떨리는 걸]이라고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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